인께서도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 이후로 여러 경험을 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예전 그분만큼 마음을 끄는 인물은 없었소. 나조차 이토록 그리워하는 분이니, 그런 일이 있다면 부부였던 니기미의 마음도 아프겠구려."
라고 인께서 말씀하시자, 뉴도의 꿈 이야기를 떠올리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카시 부인은 그 편지를 꺼냈다.
"범자(梵字)라고 하는 글자와 비슷하지만 읽기 어려운 글자로 적혀 있어도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섞여 있는 듯하여 올립니다. 예전 이별 때부터 이미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임을 말씀하셨기에 체념했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다시금 슬퍼집니다."
하고 말하며 적당히 눈물을 보였다. 인께서 편지를 받아 들고,
"훌륭하지 않소. 늙어서도 쇠하지 않은 좋은 글씨구려. 어떤 재주에도 능통하여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었건만, 처세술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사람이오. 그분의 조부 대신은 현명한 정치가였으나, 어떤 한 가지 일로 실패하는 바람에 그 업보로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소. 하지만 여계(女系)로 보면 번창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게 된 것 또한 그분의 신앙이 부처님을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오."
등등 말씀을 나누며 눈물을 닦으면서 읽으셨는데, 꿈에 관한 대목은 특히 인의 주의를 끌었다. 상식적인 행동을 못 하고 분수에 넘치는 희망을 품은 사내라는 비난을 받고, 자신조차 상식 밖의 광기 어린 결혼을 강요하는 자라고 의심하기도 했으나, 공주가 태어남으로써 전생의 인연이 이토록 깊은 사이였음을 인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미래에 대해 입도가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편지를 보니 처음부터 군왕의 어머니가 그 집안에서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듯싶다. 원죄를 뒤집어쓰고 방랑하는 운명을 짊어진 것도 이 공주가 아카시에서 태어나기 위함이었다. 신불에 건 서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음속으로 합장하며 인께서는 그 상자를 받아 드셨다.
"이것과 함께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라고 인께서 공주에게 말씀하셨다. 그 길로,
"이제 너도 네가 태어난 사정을 분명히 알게 되었겠지만, 저쪽 어머님의 호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진정한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니라 남이 조금이라도 사랑해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물며 친어머니가 네 곁에 온 뒤로도 한결같이 너를 사랑하며 너의 행복만을 바라고 있지 않느냐. 예부터 내려오는 계모 이야기처럼 겉으로만 현명한 척하며 의붓자식을 돌보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여겨지는 어머니도 있고, 또 비뚤어진 마음으로 딸을 괴롭히는 어머니도 있다. 하지만 딸이 선의로만 해석하고 신뢰를 보내면, 이런 사람을 미워하는 건 죄가 된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는 경우도 있고, 또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면 의붓딸에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어머니로서 신뢰받는 처지가 되면 어느덧 처음 태도를 바꾸기도 하는 법이다. 별일 아닌 것에 트집을 잡고 사랑이라곤 없는 무정한 계모라서 딸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 나는 여자를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태생도 좋고 부인으로서의 식견을 갖춘 이들, 각자의 장점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내 딸을 맡길 만한 이를 고르기란 참으로 어렵다. 진정 마음의 굽음이 없는 좋은 여성은 대(對)의 어머님 말고는 없다. 이분이야말로 선량한 여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선량하다고 해서 그저 사람 좋고 맺고 끊음이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법이지."
라고 타이르시는 것을 듣고, 무라사키 부인의 훌륭함을 아카시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대만이 그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니, 사이좋게 지내며 이분을 함께 모셔주구려."
라고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아카시에게 말씀하셨다.
"일일이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뇨오사마(여왕님)의 호의를 잘 알고 있기에 늘 그분께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를 무례한 여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이토록 이분을 사랑하지 않으셨을 텐데, 스스로 민망할 정도로 저를 동등한 사람처럼 대우해주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제가 떠나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공주님 곁에 있는 것은 세상의 이목이 좋지 않아 삼가고 있습니다만, 뇨오사마의 호의 덕분에 간신히 방해꾼처럼 보이지 않게 머물고 있습니다."
하고 아카시가 말하자,
"그대에게 헌신할 마음까지는 없겠지만, 공주를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지금에라도 나누고 싶어 양보하는 것이겠지. 그대 또한 친모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니 양측 사이가 원만하여 나로서는 이보다 더 안심되는 일이 없소. 사소한 일에도 얕은 억측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지니까 말이오. 그대들에게는 결점이 없으니 나도 애태울 일이 없구려."
이런 인의 말씀을 듣고 아카시는 겸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께서는 대(對)의 거처로 돌아가셨다.
"점점 뇨오사마께 애정이 기울어지시는군요. 실로 누구보다 뛰어나고 모든 것을 갖춘 분이니, 지극히 당연하다고 우리조차 생각할 만큼 행복한 분이지요. 미야(宮)님을 겉으로만 훌륭하게 대우하신다 해도, 저쪽에 계실 때가 많으니 아까운 일이라고들 합니다. 신분으로 따져도 미야님이 한 단계 더 높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공주에게 이야기를 건네면서도, 아카시는 약간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공주를 곁에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귀한 분조차 만족스럽지 못한 대우를 받는 부인들 중 하나로서, 박한 인의 애정 같은 것을 자신 따위가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라고 체념할 수 있었기에, 아카시의 마음속에 슬픔으로 남는 것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입도의 일뿐이었다. 니기미(비구니) 역시 마지막 편지에 적힌 남편의 한마디를 의지하며, 내세를 생각하면서도 수심에 잠겨 있었다.
겐 대장은 온나산노미야와 혼인할 수도 있었던 처지였기에, 그녀가 로쿠조인으로 들어온 것을 무관심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인의 아들로서 그 저택에 출입할 기회도 있었기에 은연중에 관찰하고 있었지만, 마냥 젊고 천진난만하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없는 분인 듯싶었다. 웅장한 로쿠조인의 본전에 모시고 향후의 모범이 될 만큼 화려하게 대우하고 있었으나, 그만큼의 귀부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대장은 의구심이 들었다. 여방들 또한 차분한 연배의 사람은 적고, 젊고 미인 행세를 하며 화려하게 떠들썩한 이들이 부지기수로 딸려 있어, 환락적인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거처였다. 그 속에 내성적이고 조용한 이가 섞여 수심에 잠겨 있어도 경박하게 떠드는 동료들에게 이끌려 똑같이 밝은 척을 하거나, 매일 유치한 놀이 상대나 되어주는 동녀들의 교양 없음을 인께서도 못마땅하게 여기셨으나, 한 가지 취미로만 세상을 보려 하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그것은 그것대로 허용하며 지켜보실 뿐 별다른 간섭은 하지 않으셨다. 부인이 된 궁에게만큼은 가르침을 주셨기에 예전보다는 조금 더 기품 있는 분다워지셨다. 그런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대장은 지켜보며, 뛰어난 사람이 드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무라사키노오기미님이 이렇게 긴 세월 함께 지내면서도, 누구에게도 어떤 풍모의 어떤 여성인지 상상조차 못 하게 하는 묵직함이 있어, 조용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여성이기를 바랐다. 또한 과연 밝고 명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스스로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모습이라 생각하니, 몇 년 전 노와키의 저녁에 보았던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으나, 그 사람은 상대할 만한 우월한 여성은 아니었다. 연인을 아내로 맞이한 뒤의 안일한 기분과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눈의 권태로움으로 인해, 아버지가 각기 다른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계시는 로쿠조인의 생활이 부러웠고, 모두가 자신의 아내보다 대화 상대로 더 재미있어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공주는 신분으로 보나 가장 젊고 분수에 넘치는 대장에게는 흥미를 자아내는 존재였으나, 겉모습을 장식할 뿐인 애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인의 대우를 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있을 수 없는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저 얼굴을 뵐 기회가 있기만을 바랐다. 우에몬노카미 또한 늘 로쿠조인을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이 궁을 산의 제(帝)께서 얼마나 총애하셨는지도 상세히 알고 있었고, 사위 선택 때부터 이 궁에게 호의를 품어왔다. 구혼자인 자신에게 인의 제께서도 결코 말도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소식은 들었음에도, 궁이 로쿠조인으로 시집간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마음이 상처받을 정도로 괴로워했고, 지금도 우에몬노카미는 연정을 버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터놓게 된 여방을 통해 궁의 근황을 듣는 것을 덧없는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역시 대(對)의 부인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 모양이군."
라고 세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까운 마음이 들긴 해도 자신의 아내로 삼았더라면 그런 수심은 안겨주지 않았을 텐데 싶었다. 둘도 없는 로쿠조인처럼 훌륭한 남자는 아니더라도, 이런 말을 내뱉으며 늘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고시주라는 궁의 여방을 부추기는 듯한 말을 하고, 무상한 세상인지라 출가의 뜻이 깊으신 인께서 은둔하게 될 경우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온나산노미야를 얻고 싶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우에몬노카미였다.
3월경의 화창한 날, 로쿠조인으로 효부쿄 친왕이 방문하였고, 우에몬노카미도 찾아왔다. 인께서는 곧바로 나와 그들을 맞이하셨다.
"한가한 내 거처는 이런 시절이 가장 무료해서 마음 달랠 길 없어 곤란하던 참이었소. 어디든 모두 별일 없이 평온한가 보구려.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등의 말씀을 나누시던 인께서 다시,
"오늘 아침에 대장이 왔었는데 어디에 있을까. 위로 삼아 작은 활이라도 쏘게 하고 싶을 때 마침 그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함께 온 듯했는데, 벌써 다들 나간 것인가."
하고 시종에게 물으셨다. 대장이 동쪽 저택 정원에서 축국(蹴鞠)을 시키며 구경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격렬한 놀이 같긴 하지만, 보는 눈이 시원하니 재미있지."
하고 말씀하시더니,
"이쪽으로 오라고 하게."
라고 인께서 대장을 부르시자, 곧바로 정원에서 축국을 하던 이들이 이쪽으로 왔다. 젊은 귀공자들이 많았다.
"공도 가져왔는가? 누구누구가 그쪽에 와 있는지."
대장 곁에 있던 관인들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들도 이쪽으로 오게 할까요?"
라고 대장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침전의 동쪽에 있는 방에는 기리쓰보의 어머님이 계셨는데, 와카미야를 모시고 도구(동궁)께 다녀온 뒤라 그곳은 비어 있어 조용했다. 게마리(축국)를 하는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피해 경기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모두 뜰로 나갔다. 태정대신 저택의 공자들은 도노벤(두의 벤)이라 불리는 성년자도 있고, 효에노스케나 다유노키미라고 불리는 소년티를 벗은 사람들도 섞여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모두 풍채가 훤칠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 때까지 이 경기에 적합하고 바람도 없는 좋은 날이라며 다들 말하며 정원에서의 놀이는 계속되었는데, 도노벤도 투지를 억누를 수 없었는지 그 속으로 나아갔다.
"문관들이 자랑하는 벤(弁)조차 방관할 수 없으니, 고관이 되었더라도 젊은 에후(衛府) 사람들이 얌전히 있을 필요도 없지. 내 청춘 시절에도 그런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생각되곤 했네. 하지만 경솔하게 사람들에게 보일 만한 놀이는 아니군."
인의 권유에 대장도 에몬노카미도 모두 나와, 아름다운 벚꽃 그늘을 거니는 이 저녁의 정원 풍경은 참으로 볼만했다. 그다지 점잖은 유희는 아니었으나 난폭한 운동으로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장소와 사람들의 품격 덕분일 터였다. 운치 있는 정원 숲이 아지랑이에 싸인 가운데 꽃나무가 많았고, 어린 잎 돋은 가지는 아직 적었다. 놀이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공을 차 올리는 솜씨를 겨루며 서로 뒤지지 않으려는 이들뿐이었으나, 그다지 진심을 담지 않고 섞여든 에몬노카미의 솜씨에 미칠 자는 없었다. 얼굴이 곱고 풍채가 요염한 그는 매 순간 몸가짐에 신경 쓰며 공을 찼으나,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는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정면 계단 앞 벚나무 그늘에서 다들 꽃놀이는 잊은 채 경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인과 효부쿄 친왕은 모퉁이 난간에 기대어 지켜보고 계셨다. 저마다 특색 있는 솜씨를 보여주며 승부가 계속되자, 고관들조차 오늘만큼은 격식을 차릴 수 없었는지 관의 이마 부분을 살짝 위로 밀어 올리기도 했다. 대장 또한 관위로 보아 경솔한 처신이 될 법도 했으나, 눈으로 보는 느낌은 누구보다 젊고 아름다웠다. 벚꽃 빛 직의(直衣)를 부드럽게 차려입고 사시누키의 불룩한 옷자락을 살짝 걷어 올린 자태는 결코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눈처럼 내리는 꽃잎을 올려다보며 시든 가지를 살짝 꺾어 든 대장은 계단 중간쯤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에몬노카미가 뒤이어 쉬러 오면서,
"벚꽃이 너무 많이 지겠군요. 벚꽃만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등의 말을 건네며 걷는 그는 히메미야의 거처 쪽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그곳에는 침착하지 못한 젊은 여방들이 여기저기 어렴풋이 비쳐 보였고, 가장자리로 보이는 이들의 화려한 색감의 소매 끝자락은 저무는 봄을 향한 제물의 주머니처럼 보였다. 기장(几帳) 등은 옆으로 밀쳐져 있어, 사람들의 기척이 너무나도 잘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중국산 작은 고양이를 조금 큰 고양이가 뒤쫓아와 갑자기 발을 걷고 나가려 할 때, 고양이의 기세에 놀라 옆으로 비키며 뒷걸음질 치는 여방들의 옷 스치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밖으로 들렸다. 이 고양이는 아직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지 긴 끈에 묶여 있었는데, 그 끈이 기장의 자락에 엉키는 것을 기를 쓰고 당겨 도망치려다 보니 발 한쪽이 비스듬히 걷히고 말았는데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기둥 곁에 있던 여방들도 당황하여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기장보다 조금 안쪽에 袿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계단이 있는 정면에서 서쪽으로 한 칸 떨어진 동쪽 끝이었기에, 그의 자태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였다. 홍매색 겹옷인지 진한 색과 옅은 색을 많이 겹쳐 입은 모습이 화려했고, 옷자락은 책이 포개진 단처럼 보였다. 벚꽃 색 두꺼운 직물로 된 호소나가(細長) 같은 것을 겉옷으로 입고 있었다. 자락 끝까지 선명한 검은 머리카락은 실을 늘어뜨린 듯 나풀거렸고, 가지런히 잘린 끝부분이 아름다웠다. 키보다 일곱, 여덟 치가량 더 긴 길이었다. 옷자락이 포개진 부분만 유독 도톰하여, 그는 체구가 작고 호리호리한 사람인 듯했다. 이 자태와 머리카락에 가린 옆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미인이었다. 해 질 녘의 어슴푸레한 빛 속이라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없었고, 뒤쪽으로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공놀이에 열중한 젊은 귀공자들은 벚꽃이 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을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여방들은 아직 발이 걷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고양이가 하도 울어대어 돌아본 그 얼굴에서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엿보이는 가인(佳人)임을 에몬노카미는 정원에서 발견했다. 대장은 발이 걷혀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자신이 직접 다가가 발을 내리는 것도 경솔해 보여 주의를 주기 위해 헛기침을 하자, 서 있던 사람은 조용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는 했지만 대장 자신도 아름다운 사람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그사이 고양이 끈이 정리되고 발도 내려가는 것을 보고 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물며 그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에몬노카미의 가슴은 무언가로 막힌 듯 답답했고, 저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싶었다. 여방 차림이 아닌 袿의 차림새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혼동할 수 없는 용모에서 거의 짐작 가는 이가 있었기에 더더욱 확실히 알고 싶었다. 대장은 모르는 체했지만 자신의 눈에 띈 이상 에몬노카미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니 그 귀부인이 가여워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리움과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 대장은 고양이를 불러 품에 안았는데, 고양이에게는 좋은 향내마저 배어 있었고 귀여운 울음소리까지 방금 본 사람과 닮은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다정다감(多情多感)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인께서 이 젊은 두 고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시며,
"고관들의 자리가 너무 경박하구려. 이쪽으로 오게나."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대(對)의 남쪽 좌석으로 들어가시자 사람들도 모두 뒤따랐다. 효부쿄 친왕도 내실 안으로 인과 함께 자리를 옮겨 앉으셨고, 고관들도 함께였다. 전상역인들은 깔개를 얻어 툇마루에 앉았다. 거창한 대접은 아니었으나 떡과 배, 귤 따위가 상자 뚜껑에 담겨 나오자 젊은이들은 장난치듯 그것을 먹었다. 마른 안주를 곁들여 좌석에 앉은 이들에게 술잔이 권해졌다. 에몬노카미는 가만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걸핏하면 정원의 벚꽃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장은 아까 그 광경을 함께 본 사람이었기에 에몬노카미가 마음속으로 환영을 그리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장은 히메미야가 어쩌다 저토록 무심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셨을까 싶었다. 저런 귀한 분이 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납득이 갔다. 그러한 결점이 있기에 세간에서 칭송하는 것에 비해 인의 총애가 옅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귀부인답지 않게 조심성이 없고 천진난만한 것은 가련하나, 그 여인의 남편이 된다면 안심할 수 없겠다는 경멸의 마음마저 들었다. 에몬노카미는 도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맹목적인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틈새로 비록 희미하나마 확실히 그분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오랜 사랑의 기도가 신불에 받아들여진 결과라며 스스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찰나의 순간에 그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인께서 좌중의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시다가,
"태정대신은 나와 자주 승부를 겨루곤 했는데, 축국 기술만큼은 도저히 내가 당해낼 수 없는 솜씨였지. 부모의 모든 것이 자식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예술의 길만은 신기하게도 잘 이어지는 법이야. 오늘 자네의 솜씨는 대단하더군."
하고 에몬노카미에게 말씀하시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점에서는 선조를 부끄럽게 하는 저이오나, 유전된 축국 기술로나마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나쁠 것 없소. 무엇이든 남보다 뛰어난 것을 해두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니."
등의 농담을 건네시는 인의 모습이 젊고 아름다워 보이자, 에몬노카미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분을 제치고 공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을까 하며 인과 자신을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뛰어난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몬노카미는 쓸쓸한 마음으로 로쿠조인을 나섰다. 대장도 돌아오는 길을 함께하며 차 안에서 에몬노카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