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성을 포기하는 모든 사상은 다양성을 찬양한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바로 예술이 머무는 자리이다. 정신을 해방하는 유일한 사상은 정신을 홀로 내버려 두고, 자신의 한계와 다가올 종말을 확신하게 만드는 사상이다. 어떤 교리도 정신을 유혹하지 못한다. 정신은 작품과 삶이 무르익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작품은 희망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영혼의, 거의 잦아든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려줄 것이다. 혹은 창조자가 자신의 유희에 싫증이 나 외면하려 한다면, 작품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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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나는 부조리한 창조에게 내가 사유로부터 요구했던 것, 즉 반항과 자유와 다양성을 요구한다. 그러면 창조는 자신의 깊은 무용함을 드러낼 것이다. 지성과 열정이 뒤섞여 서로를 고양하는 이 일상적인 노력 속에서,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힘을 구성할 핵심적인 훈련을 발견한다. 거기에 필요한 전념과 고집, 그리고 명석함은 곧 정복자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창조란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인물들에게 있어, 작품은 그것에 의해 정의되는 만큼이나 그들을 정의한다. 배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것 중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없다. 이 자유의 길 위에는 아직 나아가야 할 한 걸음이 더 남아 있다. 창조자나 정복자와 같은 동류의 정신들에게 마지막 노력이란, 자신의 과업으로부터도 스스로를 해방할 줄 아는 것이다. 즉 정복이든 사랑이든 창조든, 작품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이르는 일이다. 그렇게 모든 개별적 삶의 근원적인 무용함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의 부조리를 깨닫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삶 속에 모든 과잉을 안고 뛰어들게 했듯이,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이 그들에게 작품을 완성하는 데 더 큰 여유를 준다.
남는 것은 오직 그 끝만이 예정된 운명뿐이다. 죽음이라는 이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면 기쁨이든 행복이든 모든 것이 자유이다. 인간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아 있다. 그를 얽어맸던 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이제 그의 사상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속에서 튀어 오르는 운명을 지닌다. 그것은 신화 속에서 유희하지만, 인간 고통 이상의 깊이는 없으며 그 고통처럼 끝없이 샘솟는 신화일 뿐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눈멀게 하는 신적인 우화가 아니라, 어려운 지혜와 창조 이후가 없는 열정이 요약된 지상의 얼굴, 몸짓, 그리고 드라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