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샹젤리제를 지나 집으로 돌아갈 때, 나라고 할머니와 같은 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가 나와 함께 산책하러 왔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어느 오후처럼, 시계 태엽이 풀려 종이 울리기 직전의 정확한 지점에 바늘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그렇듯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종이 울리기 직전 그 첫 번째 타종을 앞둔 1분이라는 시간을 이미 거의 다 지나왔다는 두려움, 어쩌면 내 뇌 속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 타종에 대한 두려움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자, 혈관이 터지기 직전인 뇌의 불안정한 상태가 의식에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의사가 꾀병을 부리거나 삶에 대한 의지가 헛된 희망을 품게 하려 해도 자신의 명석함을 잃지 않는 부상자들이 다가올 앞날을 보고 "나는 죽을 것이고,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라며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적어 보내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수용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닥쳐올 미래에 대한 이러한 막연한 인식은, 내가 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어난,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내게 닥친 기이한 사건을 통해 내게 주어졌다. 내가 외출했던 어느 날 저녁, 사람들은 예전보다 안색이 좋아 보인다고 했고, 여전히 검은 머리를 모두 유지하고 있는 것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는 계단을 내려가다 세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외출은 고작 두 시간이었지만,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기억도, 사고도, 힘도, 아무런 존재감도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보러 오거나, 왕으로 추대하거나, 붙잡거나, 체포하러 왔더라도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조차 뜨지 않은 채 그저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카스피해를 배로 건너다 심한 뱃멀미에 걸려,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말해도 저항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엄밀히 말해 나는 아무런 병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노인이 넓적다리뼈가 부러지거나 소화불량에 걸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한 다소 긴 준비 과정에 불과한 삶을 침대 위에서 얼마간 더 이어가는 것과 같았다. 한때 '만찬'이라 불리는 야만적인 연회에 드나들던 나의 또 다른 자아, 하얀 정장의 남자들과 깃털을 달고 반쯤 몸을 드러낸 여자들 앞에서 가치관이 뒤바뀌어, 약속을 하고도 만찬에 오지 않거나 로스트 요리가 나올 때야 도착하는 사람이, 만찬 중에 가볍게 입에 올리는 비도덕적인 행위나 최근의 부고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세계, 죽음이나 중병만이 불참의 유일한 이유가 되며, 그마저도 14인용 식탁의 초대자에게 죽어가고 있다고 미리 알렸을 때만 용서받던 그 세계를 기억하던 자아는, 여전히 그 시절의 양심은 간직했으나 기억력은 잃고 말았다. 반면에 자신의 작품을 구상했던 또 다른 자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몰레 부인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고 사즈라 부인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임종 직전의 할머니처럼 혀가 굳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고 우유조차 삼킬 수 없게 되기 직전의 마지막 시간 중 하나를 사용하여, 몰레 부인에게는 사과의 편지를, 사즈라 부인에게는 조의를 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행복한 망각이었다. 내 작품에 대한 기억이 깨어 있었고, 내게 주어진 생존의 시간을 작품의 첫 토대를 놓는 데 사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글을 쓰려고 공책을 집어 드는데 몰레 부인의 초대장이 내 곁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자마자 망각의 자아는, 비록 다른 자아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만찬에 드나드는 모든 양심적인 야만인들이 그렇듯 공책을 밀쳐내고 몰레 부인에게 답장을 썼다(그녀가 알았더라면 내 건축 작업보다 그녀의 초대장에 대한 답장을 우선시한 것을 분명 높이 평가했을 테지만 말이다). 갑자기 답장 내용 중 한 단어가 사즈라 부인이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나는 그녀에게도 편지를 썼고, 그렇게 예의 바르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의무를 위해 실질적인 의무를 희생시킨 뒤 나는 힘없이 쓰러져 눈을 감았고, 이후 8일 동안은 그저 식물인간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실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던 나의 모든 무의미한 의무들이 몇 분 만에 머릿속에서 사라졌음에도, 내 건축물에 대한 생각만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신도들이 조금씩 진리를 배우고 조화로운 전체의 거대한 설계도를 발견하게 될 교회가 될지, 아니면 섬 꼭대기의 드루이드 기념물처럼 영원히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남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떠나가려는 힘을 억지로라도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마치 테두리가 완성되면 '장례의 문'을 닫을 시간을 벌 수 있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머지않아 나는 몇몇 밑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사원 안에 새겨 넣으려던 진리에 대한 나의 인식에 우호적이었던 이들조차도 내가 그것들을 '현미경'으로 발견해냈다고 치켜세웠지만, 정작 나는 아주 작은 것들을 관찰하기 위해 오히려 '망원경'을 사용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것들은 아주 작았지만, 엄청나게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각각이 하나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내가 거대한 법칙을 찾으려던 곳에서 사람들은 나를 세부적인 것만 파헤치는 사람이라 불렀다. 게다가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젊은 시절엔 재주가 있었고 베르고트는 내 중학생 시절 글을 보고 '완벽하다'고 했지만, 나는 일하는 대신 나태함과 쾌락의 방탕함, 병치레와 건강 관리, 강박 속에서 살았고, 이제는 내 직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음을 앞두고서야 작품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나 나의 사고와 작품에 대한 책무, 하물며 그 둘 모두를 감당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전자의 경우, 답장해야 할 편지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내 과업을 조금이나마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억력의 상실은 나의 의무들을 덜어냄으로써 조금 도움이 되었고, 내 작품이 그 의무들을 대신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갑자기 관념의 연상 작용이 후회와 함께 기억을 되살려냈고, 나는 무력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나를 향한 비평들에 무심한 나 자신이 놀라웠지만, 계단을 내려가다 다리가 심하게 떨렸던 그날 이후로 나는 모든 것에 무심해졌으며, 마침내 찾아올 거대한 안식을 기다리며 오직 휴식만을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작품에 대해 마땅히 보내야 할 찬사를 내 사후로 미루었기 때문에 지금의 엘리트들의 평가에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사후의 사람들이 무엇이라 생각하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었다. 사실 내가 편지 답장 대신 작품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내 나태함의 시절이나 뒤이은 작업의 시절, 계단 난간을 붙잡아야만 했던 그날까지와는 달리, 더 이상 두 가지 일 사이에 큰 중요도의 차이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기억과 관심사의 조직은 내 작품과 결부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편지들은 받는 즉시 잊힌 반면 작품에 대한 생각은 항상 그대로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 또한 내게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내게 죽어가는 어머니가 주사바늘과 부항 사이에서 끊임없이 돌봐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아들과 같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과도한 의무감으로만 그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경우에도 작가의 힘은 작품의 이기적인 요구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계단에서 있었던 그날 이후로 세상의 어떤 것도, 친구들의 우정이나 작품의 진척, 영광에 대한 희망에서 오는 그 어떤 행복도 내게는 너무나 창백한 태양처럼 느껴져 나를 따뜻하게 하거나 살아가게 하거나 어떤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마저도 아무리 창백하다 한들 눈을 감아버리고 벽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내 눈에는 너무나 눈부실 뿐이었다. 입술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어떤 부인이 "제 편지에 답장이 없어서 놀랐어요."라고 써 보냈을 때 나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그 편지는 내게 그 편지 자체를 상기시켜 주었고, 나는 답장을 썼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하려고, 지금 나의 다정함을 사람들이 내게 베풀었던 다정함의 수준으로 맞추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죽어가는 내 삶에 삶의 초인적인 피로를 지우는 것에 짓눌리고 말았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마치 사랑이 찾아오듯 내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내가 죽음을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죽음을 혐오했다. 그러나 때때로, 아직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생각하듯 죽음을 떠올리던 단계를 넘어, 이제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내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들러붙어 버려서, 무엇 하나를 하려 해도 먼저 죽음이라는 관념을 거쳐야만 했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완전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조차 죽음에 대한 관념은 자아에 대한 관념만큼이나 끊임없이 내 곁을 지켰다. 내가 반쯤 죽은 상태가 되었던 그날, 계단을 내려가거나 이름을 기억하거나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증상들이, 무의식적인 추론을 통해서나마 '나는 이미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죽음의 관념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에 찾아왔고, 정신이라는 거대한 거울이 새로운 현실을 피할 수 없이 비추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겪는 질환들로부터 예고도 없이 어떻게 완전한 죽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다른 이들을 생각했다. 매일같이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투병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내가 내부에서 그들을 보기 때문에(희망의 기만 때문이 더 컸겠지만), 비록 나는 내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내가 겪는 질환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치명적이라 여기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때가 왔음을 가장 확신하는 이들조차도 어떤 단어들을 발음하지 못할 때 그것이 발작이나 실어증과는 무관하며 그저 혀의 피로, 말더듬과 유사한 신경 상태, 혹은 소화불량 뒤에 찾아온 탈진 때문이라고 쉽게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써야 할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아내에게 남기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길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무엇이었다. 쓰기에 너무 긴 분량이었다. 낮 동안에는 기껏해야 잠을 청해보는 것이 고작일 테고, 일을 한다면 오로지 밤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수많은 밤이 필요할 것이며, 어쩌면 백 밤, 아니 천 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운명의 주인이 셰헤라자드 왕의 술탄보다 자비롭지 못할까 봐, 아침에 내가 이야기를 멈췄을 때 그가 내 사형 집행을 미루어주고 다음 날 밤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줄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천일야화』를 다시 쓰겠다는 것도, 역시 밤에 쓰였던 『생시몽 공작 회고록』을 다시 쓰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어린 시절 순진한 마음에 사랑하는 연인처럼 미신적으로 집착했던 그 어떤 책들과 다른 작품을 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스티르나 샤르댕처럼,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것을 포기함으로써만 다시 창조할 수 있다. 분명 내 책들도 육신을 지닌 나처럼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받아들여야 한다. 십 년 후의 나 자신, 백 년 후의 내 책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원한 지속은 인간에게나 작품에게나 약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 『천일야화』만큼이나 긴 책이 되겠지만, 완전히 다른 책일 것이다. 분명 어떤 작품과 사랑에 빠지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고 싶겠지만, 그 순간의 사랑을 희생해야 하며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호를 묻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 진리를 따를 때만, 때때로 우리가 포기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되고, 그것들을 잊어버린 채 다른 시대의 『아라비안 나이트』나 『생시몽 공작 회고록』을 써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내가 아직 내 작품을 완성할 힘이 남아 있다면, 바로 오늘 게르망트 공작부인 저택의 마티네에서 내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상황들의 본질은, 내가 언젠가 콩브레의 교회에서 그토록 큰 영향을 받았던 어떤 날들에 예감했던 바로 그 형태, 즉 '시간'의 형태를 내 작품 속에서 무엇보다 뚜렷하게 각인시킬 것임을 느꼈다. 과거 콩브레의 교회에서 예감했던 이 '시간'의 차원을, 나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기만적인 감각이 제공하는 것과는 필연적으로 사뭇 다를 세상의 기록을 통해 끊임없이 체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감각에는 그 밖에도 다른 오류들이 많으며(이 이야기의 여러 에피소드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듯이), 그러한 오류들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실체를 왜곡되게 보여준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노력하여 담아낼 더 정확한 기록 속에서는, 소리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지성이 사후에나 위치시키는 소리의 원인으로부터 그것을 분리하지 않도록 삼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방 한가운데서 비 소리가 들리게 하고 마당에서 약초 달이는 소리가 쏟아져 내리게 하는 것이, 화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이나 색채의 강렬함, 혹은 시선의 첫인상에 따라 우리에게 가깝게 혹은 아주 멀게 그려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나중에야 엄청난 거리만큼이나 옮겨놓는 돛단배나 산봉우리를 그리는 것보다 결코 더 당혹스러운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오류가 더 심각하긴 하겠지만, 코나 뺨, 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 욕망의 투영만이 비칠 뿐인 빈 공간이 있을 뿐임에도, 예전처럼 지나가는 여인의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려 넣는 작업을 계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작업인, 동일한 얼굴에 덧씌워야 할 백 개의 가면을 준비할 여유가 없다면 어떨까. 그 가면들은 그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 시선이 이목구비를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 혹은 같은 시선이라도 희망이나 두려움에 따라,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나이에 따른 변화를 감추어 온 사랑과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 심지어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 없이는 모든 것이 허구이자 거짓임을 깨달았음에도, 어떤 인물들을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묘사하여 그들의 아주 작은 행동조차 치명적인 파란을 일으키게 하거나, 우리 감수성의 압력 변화나 확신의 평온함에 따라 도덕적 하늘의 빛을 변화시키는 작업, 즉 어떤 대상은 그 평온함 속에서는 아주 작지만 위험이라는 단순한 구름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그 크기가 증폭되기도 하는 그런 변화들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우주를 다시 그려내는 작업 속에서,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때 필요성이 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드러났던 그러한 변화들을 비롯한 수많은 변화를 담아낼 수 없다면, 적어도 무엇보다 먼저 인간을 신체의 길이가 아니라 세월의 길이만큼 차지하는 존재로, 그리고 점점 더 거대해져 결국 인간을 압도하고 마는 과업처럼, 이동할 때마다 그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늘어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며, 이 보편성은 내가 밝혀내고자 했던 진실, 즉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진실이었기에 내게 기쁨을 주었다. 우리 모두가 시간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한 사람조차도 마치 공간 속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를 측정하듯 시간 속에서의 그 자리를 대략적으로 측정할 줄 안다. 물론 그러한 평가에서 자주 오류를 범하긴 하지만,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나이라는 것을 측정 가능한 무언가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또한 이렇게 자문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과연 내가 내 작품을 완성할 상태인가?" 가혹한 양심의 지도자처럼 나를 세상에 대해 죽게 함으로써 내게 도움을 주었던 질병(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나태함이 쉬운 길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 뒤 이제는 나태함으로부터 나를 지켜줄지도 모를 그 질병은 나의 힘을 갉아먹었고, 내가 알베르틴을 사랑하기를 그만두었던 순간부터 진작 알아차렸듯이 나의 기억력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런데 기억을 통해 인상들을 재창조하고, 그 인상들을 심화하고 명료하게 하여 지적인 등가물로 변환하는 작업은, 내가 조금 전 서재에서 구상했던 예술 작품의 조건 중 하나, 아니 거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아! 그때 『프랑수아 르 샹피』를 보며 떠올렸던 그날 저녁의 힘이 여전히 남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어머니가 굴복했던 그 저녁, 할머니의 느린 죽음과 더불어 나의 의지와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모든 것은 어머니의 얼굴에 입 맞추기 위해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그 순간 결정되었다. 나는 결심을 하고 침대에서 뛰쳐나와 잠옷 차림으로 스완 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모님은 그를 배웅했고, 나는 문이 열리고, 벨이 울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게르망트 공작의 저택에서 스완 씨를 배웅하는 부모님의 발소리, 튕겨 나오는 듯 철컥거리고, 끝없이 이어지며, 날카롭고 서늘한 그 작은 초인종 소리, 마침내 스완 씨가 떠나고 어머니가 올라오시리라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던 그 소리가, 과거 저 멀리 있는 그들 자신이 여전히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자 내가 그 소리를 들었던 순간과 게르망트 가의 마티네 사이에 필연적으로 자리 잡은 모든 사건을 생각하며, 나는 이 초인종 소리가 여전히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 울림이 어떻게 잦아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기에, 그것을 다시 배우고 제대로 듣기 위해 나는 내 주위의 가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그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기 위해 나는 내 내면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그 울림은 그곳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소리와 현재의 순간 사이에는 내가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 모든 과거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벨이 울렸을 때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 내가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이에 단절이 없었기 때문이며, 내가 한순간도 쉬거나, 존재하기를 멈추거나, 생각하기를 그만두거나, 자기 인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오래된 순간은 여전히 내게 매달려 있었고, 나는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되찾아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작품 속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부각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육화된 시간, 우리와 분리되지 않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관념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그 육체들이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는 이미 지워졌으나 그 육체를 질투의 눈으로 응시하며 시간의 질서 속에서 연장하는 이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파괴하고 싶을 만큼 질투 어린 그 수많은 기억과 기쁨과 욕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시간이 육체로부터 물러나고, 그토록 무관심하고 창백해진 기억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서 지워지며, 살아있는 육체에 대한 욕망이 더 이상 그것들을 지탱해주지 않을 때 결국 소멸하고 말 기억들에 고문당하는 이에게서도 곧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토록 긴 시간이 끊임없이 나에 의해 살아졌고 생각되었으며 분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 내가 매 순간 그것을 나에게 붙들어 매어야 하며, 그것이 나를 지탱하고 있고, 내가 그 아찔한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으며, 그것을 함께 옮기지 않고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느끼며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내가 콩브레 정원의 초인종 소리를 들었던 그날은, 그토록 멀리 있으면서도 내면적인 그 소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이 거대한 차원 속의 이정표였다. 나는 내 아래에,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 안에, 마치 수십 리 높이의 고도에라도 있는 것처럼 수많은 세월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현기증을 느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나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밑에 두고도 그토록 늙지 않은 것에 감탄했던 게르망트 공작이, 왜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으려 하자마자 금속 십자가만이 유일하게 견고하여 젊은 신학생들이 달려드는 늙은 대주교들의 다리처럼 휘청거렸는지, 그리고 왜 팔십삼 년이라는 걷기 힘든 꼭대기에서 나뭇잎처럼 떨며 겨우 걸음을 내디뎠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마치 끊임없이 자라나 때로는 종탑보다도 높아져 결국 걷는 것을 힘들고 위험하게 만들다가 갑자기 떨어져 버리고 마는 살아있는 죽마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내 발밑의 죽마가 벌써 그렇게 높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미 저 멀리까지 뻗어 내 안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있던 이 과거를 오랫동안 나에게 붙들어 맬 힘이 내게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만약 내 작품을 완성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나는 오늘 그토록 강렬하게 내게 다가온 '시간'이라는 관념의 인장을 작품에 새길 것이며, 그것 때문에 인간이 괴물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을 공간 속의 협소한 자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훨씬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로 묘사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시간이라는 세월 속에 잠겨 있는 거인처럼, 자신들이 살아온 먼 시대들 사이를 수많은 날들이 메우고 있음에도 시간 속에서 동시에 그 시대들에 맞닿아 있기에, 끝없이 확장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