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세미
잠 못 이루는 겐지는,
"내 생애 이렇게까지 남에게 냉대받은 적은 없었으니, 오늘 밤 처음으로 인생이란 슬픈 것임을 배웠구려. 부끄러워 살 수가 없을 것 같소."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고기미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겐지는 아이가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손에 닿는 자그마한 몸집과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던 그 여인의 머리카락도 이것과 닮은 듯하여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억지로 여인을 움직이려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라 여겨졌고, 또한 진심으로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어 그 뒤로는 전언을 보내는 일도 그만두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돌아간 것을 고기미는 가엾고 아쉽게 여겼다. 여인 역시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지만, 그 뒤로는 더 이상 편지도 오지 않았다. 화가 나신 것이라 생각함과 동시에 이대로 자신이 잊혀지는 것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길을 억지로 그분이 계속 오가시는 것도 싫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제 결말이 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성적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겐지는 참으로 무정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상황에만 맡겨둘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토록 무정하고 원망스러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잊으려 해도 내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단다.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네가 만들어주렴."
고기미는 늘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곤란하면서도 이런 일로 자신을 겐지가 필요한 인물로 여겨주는 것이 기뻤다. 어린 마음에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사이 기이노카미가 임지로 떠나고 여인의 가족들만 남게 된 어느 날, 저녁 무렵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에 자신의 수레에 겐지를 함께 태우고 집으로 왔다. 아무래도 안내자가 어린아이인지라 겐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신중하게 행동할 처지도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을 하고 기이노카미 집의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들어갔다. 소년인지라 집안의 사무라이들이 뒤따라 나와 맞이하거나 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쪽 처마 밑 문밖으로 겐지를 세워두고, 고기미는 툇마루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남쪽 모퉁이 방 밖에서 힘차게 두드려 문을 열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방 안을 봅니다."
하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오늘 이렇게 더운데 벌써 격자문을 내렸나요?"
"낮부터 서쪽 대전(신덴 좌우에 있는 대옥 중 하나)의 아가씨께서 오셔서 바둑을 두고 계십니다."
하고 여관이 말했다.
겐지는 연인과 그 의붓딸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엿보려 열려 있던 문으로 들어가 처마 밑 문과 발 사이로 섰다. 고기미가 열어두게 한 격자문이 그대로 있어 밖에서 저녁 빛이 들어왔기에 서쪽을 향한 저 건너편 방까지 훤히 보였다. 이 방의 발 근처에 세워둔 병풍도 끝부분이 적절하게 접혀 있었다. 평소라면 눈에 거슬릴 법한 휘장도 오늘 더위 탓에 아래를 걷어올려 장대에 걸어두었다. 등불은 사람 앉은 자리에 가까이 놓여 있었다. 중앙 방의 기둥에 기대어 앉은 이가 그리운 여인일까 싶어 우선 그쪽으로 눈이 갔다. 진한 보라색 비단 홑옷을 겹쳐 입고 그 위에 겉옷을 걸친, 머리 모양이 갸름하고 몸집이 작은 여인이다. 얼굴 등은 정면에 앉은 사람에게조차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는 눈치였다. 야윈 손은 소매 밖으로 조금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전부 볼 수 있었다. 하얀 얇은 비단 홑옷에 연남색 작은 겉옷을 걸치고, 붉은 바지 끈 매듭까지 옷깃이 헤어져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매우 예의 없는 모습이다. 피부가 희고 살집이 좋은 데다 두상과 이마 모양이 아름다웠다. 눈매와 입가에 애교가 있어 화려한 얼굴이다. 머리숱이 많고 길지는 않으나 양 갈래로 나누어 얼굴에서 어깨로 드리워진 모습이 예뻐 전체적으로 명랑한 미인으로 보였다. 겐지는 이래서 부모가 자랑하는구나 싶어 흥미가 당겼다. 차분한 성격을 조금 더해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잠시 들었다. 재치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바둑이 끝나고 끝내기 돌을 놓을 때 등은 제법 똑똑해 보였으며, 경박하게 떠들어대는 것이다. 안쪽에 있는 여인은 조용히 그것을 다독이듯,
"자, 기다려 보세요. 거기는 양쪽 다 똑같은 수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그쪽 수가 있군요."
하고 말하는데,
"아니에요, 이번에는 졌어요. 참, 이 모퉁이 부분을 계산해야지요."
손가락을 꼽으며 열, 스무, 서른, 마흔 하고 세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무수히 많다는 이요의 온천 온천 통나무 개수도 이 여인이라면 금세 알아맞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상스럽다. 소매로 입가까지 완전히 가려 훔쳐보는 남자에게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 나머지 한 사람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자니 점점 자세히 보였다. 눈이 약간 부어 보이고, 코도 오뚝하게 솟은 편은 아니다.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고 하나하나 따져보면 못생긴 얼굴에 속하지만, 맵시가 워낙 좋아 아름다운 다른 한 사람보다 사람의 주의를 더 많이 끌 만했다. 화려한 애교가 있는 얼굴을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으로 빛내며 웃는 쪽의 여인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확실히 미인이다. 경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젊은 겐지는 그 모습에도 관심이 갔다. 겐지가 지금까지 알고 지낸 여인들은 모두 올바르고 예의 바르며, 조신하게 꾸민 이들뿐이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여인의 모습을 엿본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훔쳐보는 남자가 있는 줄 모르는 여인이 가엽긴 했지만 조금 더 서 있고 싶었다. 그때 고기미가 툇마루로 나오려는 기색이 보여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처마 밑 문과 마주 보는 와타도노 입구 쪽으로 가 있자 고기미가 다가왔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 없는 분이 와 계셔서 누님 곁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오늘 밤 안에 돌려보내려나? 만나지 못하면 허무하구나."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분이 가시면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무척 성공할 자신이 있는 듯한 말투였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눈치가 빠르니 잘될지도 모른다고 겐지는 생각했다. 바둑 승부가 드디어 끝난 것인지, 사람들이 흩어져 일어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어디 계시나요? 이 격자문을 닫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격자문을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이제 다들 자려는 모양이구나. 그럼 들어가서 잘 처리해 보아라."
라고 겐지는 말했다. 고기미 또한 굳은 의지를 가진 누나의 마음은 돌리기 어려울 것임을 알고는 상의하지도 않은 채, 곁에 사람이 적을 때 침실로 겐지를 안내해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기이노카미의 누이동생도 이곳에 있는가. 나에게 엿볼 수 있게 해주게."
"그런 말씀 마세요, 격자문 옆에는 휘장이 세워져 있으니까요."
라고 고기미가 말한다. 과연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하고 겐지는 우습게 여겼으나 보았다는 사실은 알리지 말아야지, 가엾은 일이다 생각하며 그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 고기미는 이번에는 옆의 문을 열게 하여 들어갔다.
여관들은 모두 잠들었다.
"이 문지방 앞에서 나는 자겠다. 바람이 잘 통하니까."
하고 말하며 고기미는 판자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여관들은 남동쪽 모서리 방으로 모두 들어가 잠든 듯했다. 고기미를 위해 처마 밑 문을 열어주러 나왔던 동녀도 그곳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잠시 자는 척 연기를 하다가, 고기미는 그 모서리 방에서 비쳐 나오는 등불을 펼친 병풍으로 가리고는 이쪽 어두워진 처마 밑 문 앞 방으로 겐지를 이끌어 들였다. 남의 눈에 띄어 망신당할까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겐지는 이끄는 대로 중앙 모야의 휘장 드리운 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나, 집 안이 모두 잠든 시간이라 부드러운 겐지의 옷깃 스치는 소리도 귀에 거슬렸다. 여인은 요즈음 겐지의 편지가 오지 않게 된 것을 안심할 일로 여기려 했지만, 지금도 꿈만 같은 그날 밤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 잠 못 이루고 있던 참이었다.
남몰래 하는 사랑은 낮에는 종일토록 그리움에 잠기고 밤에는 잠 못 이루기 일쑤인 여인에게 겐지는 이 사람을 두고 있었다. 바둑 상대인 딸은 오늘 밤은 여기서 묵겠다고 말하며 풋풋하고 거리낌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천진난만하게 딸은 깊이 잠들었지만, 겐지가 이 방으로 다가와 옷에 밴 향기로운 향내를 풍겼을 때 이를 알아차리고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여름의 얇은 휘장 너머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어둠 속에서도 잘 느껴지는 것이었다. 조용히 일어나 얇은 적삼 하나만 걸친 채 살며시 침실을 빠져나갔다.
안으로 들어온 겐지는 밖에 아무도 없고 홀로 여인이 잠들어 있는 것에 안도했다. 장대 아래쪽에는 여관 두어 명이 자고 있었다. 위를 덮고 있던 옷을 치우고 다가갔을 때, 그때의 여인보다 덩치가 큰 듯해도 겐지는 여전히 연인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너무나 깊이 잠들어 있는 것 등에 의구심이 생겨나, 비로소 겐지는 그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는 동시에 분한 마음이 들었으나,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말하며 여기서 나가기도 수상쩍게 여겨질 것이기에 난처하다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 사람이 숨어 있는 곳으로 가더라도 이토록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애쓰는 사람은 마음 편히 만나줄 리도 없고 그저 멸시당할 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여인이 그때의 미인이었다면 오늘 밤의 연인에게 이리 해도 좋을 법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로써 무정한 여인에 대한 겐지의 사랑도 그 깊이가 어떠한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겨우 잠에서 깬 여인은 참담한 사태에 그저 놀라기만 할 뿐, 겐지의 마음속에는 여인을 진심으로 가엽게 여기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녀인 것에 비해 꽤나 경박하고 당돌한 여인은 당황하지도 않았다. 겐지는 자신이 아닌 척하고 싶었으나, 나중에 다시 여인을 생각해보니 자신에게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라 해도, 세간의 눈을 그토록 의식하던 연모하는 냉정한 여인에게 이 일로 비밀이 탄로 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잦은 방위 피하기로 이 집을 택한 것은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였다고 일러두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계모와의 관계를 알 법도 하건만, 젊은 아가씨의 마음으로는 아무리 당돌한 여인이라 해도 그곳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밉지는 않아도 마음이 끌리는 구석이 없다고 느껴져, 지금 이 순간에도 겐지의 마음은 무정한 이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느 구석에 숨어서 내 애타는 마음을 비웃고 있을까. 이토록 진실한 마음이 흔한 것도 아닐 텐데.' 하고 조롱해 보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새로운 연인도 가련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어서, 겐지는 달콤한 말로 장래를 약속하곤 했다.
"공연한 관계보다 이렇게 남몰래 만나는 편이 사랑을 더 깊게 한다고 예로부터들 하지요. 그대도 나를 사랑해주오. 나도 세간의 이목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구려. 그대 쪽에서도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이 관계를 좋게 봐줄지 지금부터 걱정되오. 나를 잊지 말고 다시 만나러 올 때까지 기다려 주오."
따위의 싸구려 바람둥이 같은 말투로 말을 건넸다.
"사람들에게 이 비밀을 알리고 싶지 않으니, 저는 편지도 못 드려요."
여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두에게 의심받는 행동은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집의 어린 덴조비토, 그 아이에게 맡겨서 나도 편지를 보내리다. 조심해야 하오, 비밀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라고 말하고는, 겐지는 연인이 조금 전 벗어놓은 듯한 핥은 홑옷 하나를 손에 들고 나갔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고기미를 깨우자, 겐지를 걱정하며 잠들었던 터라 곧바로 눈을 떴다. 고기미가 처마 밑 문을 조용히 열자, 나이 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과장되게 말했다. 귀찮다고 여기면서도 고기미는,
"저예요."
하고 대답했다.
"이런 한밤중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잔꾀가 많은 늙은 시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기색이다. 고기미는 밉살스러워하며,
"잠깐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