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라이몽 드 세봉의 변론.
학문은 참으로 매우 유용하고 위대한 부분이다. 학문을 멸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증명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학문의 가치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극단적인 수준에까지 이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 헤릴루스처럼 학문 안에 최고의 선이 있다고 여기고, 학문이 우리를 현명하고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학문이 모든 덕의 어머니이며 모든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다른 이들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긴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고 그 점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50년 넘게 우리 집을 이끌었던 나의 아버지는 프랑수아 1세 왕이 문학을 포용하고 장려하며 보여주었던 그 새로운 열기에 고무되어, 학식 있는 사람들의 교분을 매우 신중하게 큰 비용을 들여 구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마치 성자이자 신성한 지혜를 특별히 영감받은 존재인 양 집으로 맞아들였고, 그들의 격언과 담론을 신탁처럼 여기며 받아들였다. 또한 아버지는 그 학문들을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었기에(그의 선대들이 그러했듯 아버지 역시 학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만큼 더 큰 경외심과 종교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나는 학문을 좋아하지만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중에서도 당시 학식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에르 뷔넬은 내 아버지와 함께 몽테뉴에서 며칠을 머물며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고, 떠날 때 『자연 신학, 혹은 피조물의 책(Theologia naturalis; siue Liber creaturarum)』이라는 저자 라이몽 드 세봉의 책을 선물했다. 당시 내 아버지는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에 익숙했는데, 이 책은 스페인어를 라틴어 어미로 엉터리처럼 바꾼 형태로 쓰여 있었기에 아버지가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이 당시 상황에 매우 유용하고 적절한 책이라며 아버지에게 권했다. 때는 루터의 새로운 사상이 신용을 얻기 시작하여 곳곳에서 우리의 오랜 믿음을 흔들어 놓던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이 상황에 대해 매우 훌륭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성적인 담론을 통해 이 질병의 시작이 머지않아 끔찍한 무신론으로 쉽게 기울 것이라 예견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사물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어 운명과 외양에 휩쓸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극도로 경외하던 의견들, 예컨대 구원과 직결된 문제들에 대해 멸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대담함을 쥐여주고, 종교의 일부 조항들을 의심하게 하거나 저울질하게 만들고 나면, 그들은 곧바로 그들이 흔들린 것들보다 더 권위 있거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다른 신념조차 쉽게 불확실한 상태로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법의 권위나 오랜 관습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받아들였던 모든 인상을 마치 폭군적인 굴레라도 되는 양 떨쳐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것을 열망하며 짓밟으니,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결정과 특별한 동의가 없는 것은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아버지는 우연히 버려진 종이 더미 속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내게 프랑스어로 번역하라고 명하셨다. 저자의 생각이 담긴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저자들은 번역하기 쉽지만, 문장의 품격과 우아함에 많은 공을 들인 저자들을 더 빈약한 언어로 옮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내게는 매우 낯설고 새로운 작업이었지만, 마침 당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이 세상 최고의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터라 어떻게든 끝마쳤다. 아버지는 이 번역을 매우 기뻐하며 출판하라고 지시하셨고, 그 결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출판되었다. 나는 이 저자의 상상력이 아름답고 저서의 구성이 논리 정연하며, 그 의도가 매우 경건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찾고, 특히 우리가 더 정성을 다해야 할 부인들이 즐겨 읽기에, 나는 종종 그들이 제기하는 두 가지 주요한 반론으로부터 이 책을 변호해주곤 했다. 이 책의 목적은 대담하고 용기 있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인 이유를 통해 무신론자들에 맞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확립하고 증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그 주제에 있어 이보다 더 견고하고 훌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도 이와 대등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믿는다. 이 저서는 저자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그가 약 200년 전 툴루즈에서 의학을 했던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뿐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풍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아드리안 투르네뷔스에게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는 이것이 아마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정수만 뽑아낸 것일 거라고 답했다. 그처럼 무한한 학식과 감탄할 만한 기지로 가득 찬 정신만이 그런 상상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저자가 누구이고 누가 고안했든, 더 큰 이유 없이 세봉에게서 그 이름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고 많은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에 대해 제기되는 첫 번째 비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한 특별한 영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적인 이성으로 뒷받침하려 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론에는 신앙적인 열정이 깃들어 있는 듯 보이기에, 우리는 그런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더욱 부드럽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설득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나처럼 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신학에 정통한 사람의 몫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계몽해주신 그 진리처럼, 인간의 지성을 아득히 뛰어넘는 지고하고 신성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특별하고도 특권적인 은총으로 신께서 다시 한번 도움을 주셔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수단만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고대에 그토록 풍부한 천부적 재능을 갖추고 뛰어났던 수많은 영혼들이 사색을 통해 그 지식에 도달하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 종교의 고귀한 신비들을 생생하고 확실하게 포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도구들을 우리 신앙의 봉사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매우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그 도구들에 부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용도라는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모든 연구와 사상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확장하며 증폭시키려 노력하는 것보다 기독교인에게 더 가치 있는 과업이나 목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과 영혼으로만 신을 섬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에게 육체적인 경의를 표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지체와 움직임, 외부 사물들을 신을 공경하는 데 사용한다.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이성을 동원해 신앙을 뒷받침해야 한다. 단, 그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노력과 논증이 그토록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학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만약 신앙이 특별한 주입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고, 단지 담론과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들어온다면, 그것은 본연의 존엄성과 찬란함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실상 나는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만 신앙을 향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까지 하다. 만약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신에게 매달린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신을 통해 신에게 매달린다면, 우리가 신성한 발판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적인 계기들이 지금처럼 우리를 뒤흔들 힘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요새는 그토록 미약한 공격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 통치자들의 강요, 당파의 행운, 경솔하고 우연한 의견의 변화 따위가 우리의 신념을 흔들거나 변질시킬 힘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논증이나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수사학의 설득에도 신념이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며, 그 어떤 물결에도 굽히지 않는 확고부동한 태도로 맞섰을 것이다.
거대한 바위가 밀려오는 파도를 튕겨내듯, 제 몸집으로 사방에서 짖어대는 온갖 물결을 흩뜨리누나.
만약 신성의 광채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그 빛은 어디에나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 환한 빛과 윤기가 배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 고귀한 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모습으로 보일 터이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분파들조차 그 교리가 아무리 어렵고 생소할지라도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교리에 맞추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물며 이토록 신성하고 천상적인 가르침을 받는 기독교인들은 오직 말로만 그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니 말이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가? 우리의 도덕적 품행을 이슬람교도나 이교도의 그것과 비교해보라. 우리는 언제나 그들보다 뒤처져 있을 것이다. 우리 종교의 우월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극도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게 빛나야 마땅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들은 어찌 저리 정의롭고 자비롭고 선한가? 틀림없이 기독교인이겠구나'라고 말하게 해야 한다. 희망, 신뢰, 사건, 의식, 참회, 순교와 같은 다른 모든 현상은 모든 종교에 공통된 것이다. 우리 진리의 독특한 표식은 우리의 덕행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천상적인 표식이자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며, 진리가 낳은 가장 고귀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선한 성 루이 왕은 기독교인이 된 타타르의 왕이 리옹에 와서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고 우리 풍습 속에서 기대했던 성스러움을 확인하려 했을 때, 오히려 우리의 방탕한 생활 방식이 그에게 성스러운 신앙에 대한 환멸을 줄까 두려워 그를 극구 만류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물론 그 후 같은 목적으로 로마에 갔다가 그 시대 성직자와 민중의 방탕함을 목격하고는, 오히려 그토록 부패하고 사악한 이들의 손에서도 우리 종교가 자신의 존엄과 찬란함을 유지하는 것을 보며 우리 종교가 얼마나 큰 힘과 신성을 지녔는지를 깨닫고 더욱 깊이 신앙을 다지게 된 다른 왕의 경우도 있었다. 성서에 이르길, 우리에게 믿음이 단 한 방울만 있어도 산을 옮길 것이라 하였다. 신성에 인도되고 동반되는 우리의 행동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닐 것이며, 우리의 신앙처럼 기적적인 무언가를 지니게 될 것이다. 만약 믿음이 있다면, 정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가르침은 짧은 법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믿지도 않는 것을 믿는 척하며 세상을 속인다. 더 많은 수의 다른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 것인지 깊이 통찰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지금 우리 국가를 짓누르는 전쟁에서 사건들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이상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그곳에 우리 자신의 것만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 당파에 깃든 정의는 그저 장식과 명분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훌륭하게 주장되지만,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내면화되지도 않으며 진심으로 옹호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당사자의 마음과 애정 속이 아닌, 변호사의 입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신은 자신의 특별한 도움을 우리의 열정이 아닌 신앙과 종교에 베푸신다.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종교를 이용하고 있으나,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이토록 곧고 확고한 규칙에서 밀랍처럼 온갖 반대되는 형상을 뽑아내는 우리의 손에 의해 종교가 좌우되고 있음을 느끼는가? 오늘날 프랑스만큼 이것이 잘 드러난 적이 있었던가? 왼쪽으로 취한 자들이나 오른쪽으로 취한 자들, 검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희다고 말하는 자들 모두 이를 자신의 폭력적이고 야망 넘치는 기도에 똑같이 이용하고, 방종과 불의에 있어 이토록 일치된 행보를 보이니, 우리 삶의 지침과 법이 달려 있는 그 사안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의견의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심스럽고 믿기 어려운 것인지 보라. 같은 학교와 규율에서 이보다 더 통일되고 하나 된 도덕관이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의 이치를 얼마나 끔찍하게 제멋대로 주무르는지, 그리고 이 공적인 폭풍 속에서 운명이 우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불경하게 그것들을 내치고 다시 취하는지 보라.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신하가 군주에게 반기를 들고 무장하는 것이 허용되는가?'라는 이 엄숙한 명제를 기억해보라. 작년에 어느 입에서 그것을 긍정하는 답이 한 당파의 버팀목이 되었고, 또 다른 당파에서는 무엇이 부정하는 버팀목이었는지를 말이다. 지금은 또 어느 쪽에서 그 긍정과 부정의 목소리와 가르침이 나오는지 들어보고, 이 이유 때문인 무기들의 소음이 저 이유 때문인 것보다 덜한지도 살펴보라. 우리는 진리가 우리 필요의 멍에를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을 불태워 죽이지만, 프랑스는 그것을 말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가? 진실을 고백하자면, 만약 적법한 군대조차도 오직 종교적 열정이라는 감정만으로 나아가는 자들과, 국가의 법이나 군주에 대한 봉사라는 보호만을 바라보는 자들을 가려낸다면, 제대로 된 기병대 한 부대조차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공적인 움직임 속에서 동일한 의지와 행보를 유지하는 이들이 그토록 적고, 때로는 느릿하게 걷다가 때로는 말처럼 거칠게 질주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같은 사람이 때로는 폭력과 가혹함으로 일을 망치고, 때로는 냉담함과 무기력함, 둔함으로 일을 그르치는가? 그들이 개인적이고 우연한 고려 사항들에 이끌려 그 다양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우리가 우리의 열정을 부추기는 종교적 의무에만 기꺼이 헌신한다는 점을 분명히 본다. 기독교적인 것만큼 탁월한 적대감은 없다. 우리의 열정은 그것이 증오, 잔혹함, 야망, 탐욕, 비방, 반역을 향한 우리의 성향을 뒷받침할 때 기적적인 힘을 발휘한다. 반대로 선함, 자비, 절제를 향할 때면, 기적처럼 드문 천성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그 열정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날개조차 펴지 못한다. 우리의 종교는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감싸고 기르고 부추기고 있다. 흔히 말하듯 하느님을 건초 수염으로 속여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믿음 차원에서라도, 심지어 우리의 큰 혼란을 무릅쓰고 말하건대, 우리가 하느님을 다른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 동료 중 한 사람처럼 믿고 알고 있다면, 하느님에게서 빛나는 무한한 선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것이다. 적어도 부, 쾌락, 영광, 친구들과 같은 수준의 애정을 그분에게 보낼 것이다. 우리 중 가장 나은 사람조차 이웃이나 친척, 주인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쪽에는 우리의 사악한 쾌락의 대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와 동등한 지식과 확신을 가진 불멸의 영광의 상태가 있을 때, 그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와 맞바꾸려 할 만큼 어리석은 지성을 가진 이가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순전한 경멸 때문에 자주 신앙을 저버린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신성모독으로 이끄는가? 모욕을 가하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가 아닌가?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오르페우스의 비의에 입문할 때, 사제로부터 이 종교에 헌신하는 자들은 죽은 뒤 영원하고 완벽한 복락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대는 죽지 않는가?" 디오게네스는 평소 자신의 방식대로 더 무뚝뚝하게, 그리고 우리 논점에서 더 벗어나서,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설득하며 저세상의 복락을 얻기 위해 자기 교단에 들어오라고 설교하는 사제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아게실라오스와 에파미논다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송아지 같은 그대는 사제라는 이유로 아주 행복해질 것이라고 내가 믿길 바라는가?" 영원한 복락에 대한 이런 거창한 약속들을 우리가 철학적인 담론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죽음을 지금처럼 그렇게 공포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죽어가며 해체되기를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뱀이 허물을 벗듯, 혹은 늙은 사슴이 긴 뿔을 갈아치우듯, 밖으로 나가기를 기뻐하리.
우리는 '나는 해체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라고 말할 것이다. 영혼의 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담론이 가진 힘은 그의 제자 중 일부를 죽음으로 내몰아, 그가 제시한 희망을 더 빨리 누리게 만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종교를 오직 우리 방식대로, 우리 손을 거쳐 받아들일 뿐이며, 다른 종교들이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는 우연히 이 종교가 통용되는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그 유구한 역사를 보거나, 그것을 지켜온 이들의 권위를 따르거나, 불신자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그 약속을 좇는다. 그러한 고려 사항들은 우리의 신앙에 활용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것들은 인간적인 유대에 불과하다. 다른 지역에서, 다른 증인들이 똑같은 약속과 위협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정반대의 신앙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인 것은 우리가 페리고르 사람이거나 독일인인 것과 같은 자격에 불과하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절박한 위험이 닥치면 신성한 힘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 만큼 무신론에 확고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역할은 참된 기독교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지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인간의 유한한 종교들이나 할 일이다. 비겁함과 마음의 나약함이 우리 안에 심고 뿌리내리게 한 신앙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믿음을 거부할 용기가 없어서 믿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신앙이라니. 변덕과 당혹스러움 같은 악한 열정이 어떻게 우리 영혼 안에서 질서 정연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플라톤은 그들이 지적인 판단을 통해 지옥이나 사후의 형벌에 관한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늙거나 병들어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것을 경험하게 될 기회가 생기고, 그때 다가올 운명에 대한 공포로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새로운 믿음으로 채운다고 말한다. 그러한 인상이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들기 때문에 그는 법에서 그런 위협에 대한 가르침과,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모든 악은 그것이 일어날 때 그 인간의 더 큰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치유를 위한 효과가 아니라면 신으로부터 온다는 믿음을 금지한다. 그들은 비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는 테오도로스의 무신론에 물들어 오랫동안 종교적인 사람들을 비웃었으나, 막상 죽음이 닥치자 가장 극단적인 미신에 굴복했다고 한다. 마치 신들이 비온의 상황에 따라 있고 없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과 이러한 예시들은 우리가 이성이나 힘에 의해 신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려 한다. 무신론은 본래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명제이며, 인간의 정신이 아무리 오만하고 무질서하다 해도 그 안에 뿌리내리기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세상에는 허영심이나 남다른 의견을 품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자부심 때문에 겉으로만 무신론을 표방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바보 같기는 해도 그것을 자신의 양심 속에 뿌리내릴 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대들이 그들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면 그들은 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두려움이나 질병이 그 방종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의 열기를 꺾고 짓누를 때면, 그들은 다시 돌아와 조용히 대중적인 믿음과 관습에 이끌리게 될 것이다. 진지하게 소화된 교리와 이러한 피상적인 인상은 다르다. 후자는 흐트러진 정신의 방종에서 태어나 상상 속에서 무모하고 불확실하게 떠다닐 뿐이다. 스스로의 능력보다 더 나빠지려 애쓰는 참으로 비참하고 얼빠진 인간들이여! 이교도의 오류와 우리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무지는 그 위대한 영혼을 타락하게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위대함일 뿐이며, 아이들과 노인들이 종교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는 또 다른 인접한 오류에 빠져 있는데, 마치 종교가 우리의 나약함에서 태어나고 그 힘을 얻는 것처럼 여기는 꼴이다. 우리의 판단과 의지를 묶어주고, 우리의 영혼을 조여 창조주와 이어주는 매듭은 우리의 사려나 이성, 열정이 아니라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결속에서 그 굴곡과 힘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신의 권위와 은총이라는 하나의 형태와 얼굴, 그리고 빛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신앙에 의해 다스려지고 지배받고 있으니, 신앙이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다른 모든 부분을 능력에 따라 봉사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또한 이 거대한 기계 장치에 이 위대한 건축가의 손길이 새겨진 흔적이 전혀 없으며, 세상을 만든 이에게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이미지가 만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는 이 고귀한 피조물들에 자신의 신성을 새겨놓았으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나약함 때문일 뿐이다. 신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길, 자신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보이는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신다고 하셨다. 세봉은 이 가치 있는 연구에 몰두했고, 세상의 그 어떤 조각도 자신의 창조주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약 우주가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의 선하심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하늘, 땅, 원소들, 우리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이 이에 공명한다. 그것들을 활용할 방법을 찾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이해할 능력이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아주 신성한 사원이며, 인간은 그 안으로 들어와 죽은 자의 손이 아닌 신의 생각이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든 조각상들, 즉 우리에게 지성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태양과 별, 물과 땅을 관상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드러나며, 영원한 지혜와 그분의 신성은 그분이 만드신 작품을 통해 고찰된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얼굴을 세상에 숨기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운행하시며 그 모습과 몸을 드러내 보이신다. 당신 자신을 거듭 주입하고 내어주시어, 사람들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게 하시고, 그분의 법을 따르도록 가르치신다.
우리의 인간적인 이성과 담론은 무겁고 불임인 물질과 같으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의 형상이며, 그것에 형태와 가치를 부여한다. 소크라테스와 카토의 덕 있는 행동들이 궁극적인 목적을 갖지 못하고 만물의 참된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알지 못했기에 헛되고 쓸모없게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상과 담론도 그러하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몸을 갖추고 있으나 하느님의 신앙과 은총이 결합되지 않으면 빛도 형태도 없는 무질서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신앙이 세봉의 논증을 물들이고 비출 때, 그것은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 된다. 그 논증들은 배우는 이에게 이 지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출발점이자 일차적인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배우는 이를 어느 정도 다듬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시키며, 그 은총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보완되고 완성된다. 나는 문학에 조예가 깊은 권위 있는 한 사람이 세봉의 논증을 통해 불신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내게 고백했던 일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 논증들에서 신앙의 장식과 도움, 승인을 벗겨내고 그것들을 순수한 인간적인 상상으로 간주하여 무신론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어둠 속에 빠진 이들과 싸우려 한다 해도, 그것들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같은 조건의 다른 그 무엇 못지않게 견고하고 단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에게 이렇게 말할 처지에 서게 된다.
"그대에게 더 나은 것이 있다면 내놓아 보라. 그렇지 않다면 그저 복종하라."
그들이 우리의 증거가 지닌 힘을 감내하든, 아니면 다른 주제에 관해 더 잘 짜이고 더 풍부하게 다듬어진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든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하라. 나는 생각지도 않게 세봉을 대신하여 답변하려 했던 두 번째 반론에 이미 절반쯤 빠져들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논증이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바를 입증하기에 너무나도 미약하고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그것을 쉽게 반박하려 든다. 이들은 첫 번째 반론자들보다 더 위험하고 악의적이기에 조금 더 거칠게 다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자신의 편견에 맞춰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신론자에게는 모든 글이 무신론으로 귀결된다. 그는 결백한 소재마저 자신의 독기로 오염시킨다. 이들은 세봉의 논거를 시시하게 느끼게 만드는 판단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순수하게 인간적인 무기로 우리 종교를 공격할 자유를 줌으로써 아주 좋은 기회를 선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작 권위와 계명으로 가득 찬 종교의 위엄 앞에서는 감히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내가 택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오만함과 인간의 자부심을 짓밟고 발아래 뭉개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공허함과 허영,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보잘것없는 이성의 무기를 빼앗으며, 신성한 위엄의 권위와 경외심 앞에 그들의 고개를 숙이고 땅에 입을 맞추게 하는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오직 그분께만 속하며, 스스로 무엇인가 가치 있다고 여기고 우리가 뽐내며 자부하는 모든 것은 오직 그분께로부터 훔쳐온 것일 뿐이다.
신께서는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이 거만하게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악한 영의 독재가 뿌리내리는 첫 번째 토대인 이런 오만한 생각을 타파하자.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플라톤은 지성은 신들에게만 온전히 있고 인간에게는 없거나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는 우리의 유한하고 덧없는 도구들이 신성하고 고귀한 우리 신앙과 이토록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그 도구들을 죽을 수밖에 없고 덧없는 본성을 지닌 대상에 사용할 때 그보다 더 잘 맞거나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 세봉의 논거보다 더 강력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담론과 사색을 통해 어떤 확실한 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 논적과 맞서며, 우리 이성으로 확립할 수 없는 우리 신앙의 부분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부당함을 질책한다. 그는 우리 사색으로는 그 본질과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아무것도 보지 못함을 시인하는, 알려진 확실한 경험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호기심 많고 기발한 탐구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 그들에게 그들의 이성이 얼마나 나약한지 납득시키기 위해 희귀한 사례를 굳이 골라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너무나 부족하고 눈멀어서 아무리 명확하고 쉬운 일도 충분히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쉬운 것이나 어려운 것이나 그들에게는 매한가지고, 모든 주제와 자연 전반이 그들의 관할과 개입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리가 우리에게 세속의 철학을 멀리하라고 설교할 때, 우리의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음에 불과하며, 모든 허영 중에서 가장 헛된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자는 지식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그토록 자주 가르칠 때, 도대체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파하는 것인가? 성령의 이러한 구절들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명확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이들을 상대할 때는 다른 증거가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대가를 치르며 매질당하기를 원하고, 자기네 이성을 오직 이성 자체로만 반박하는 것 외에는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인간 홀로, 외부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무기로만 무장하고, 인간의 모든 명예와 힘, 존재의 근간인 하느님의 은총과 지식은 결여된 채로 그를 고찰해보자. 이 훌륭한 차림새로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자. 그가 사색의 힘으로 자신이 다른 피조물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큰 이점들을 어떤 토대 위에 쌓아 올렸는지 나에게 설명해보게 하라. 천공의 그 감탄스러운 움직임과 머리 위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도는 횃불들의 영원한 빛, 그리고 이 무한한 바다의 무시마한 움직임이 인간의 편의와 봉사를 위해 정해져서 수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누가 그를 설득했는가? 자신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상처받기 쉬운 이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 우주를 지배하는 주인이라 자처하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알지 못하며, 지배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 거대한 구조물에서 그 아름다움과 구성 요소를 인식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존재이며, 유일하게 건축가에게 감사할 수 있고 세상의 수입과 지출을 계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 특권은 도대체 누가 그에게 부여했는가? 이 아름답고 거창한 임무를 맡았다는 증명서라도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하라. 그것이 현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바보들과 악인들이 그토록 특별한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들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그 말을 믿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것인가? 당연히 이성을 사용하는 생명체들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신들과 인간들이며, 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는 결코 없다.' 우리는 이 결합의 뻔뻔함을 아무리 비웃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불쌍한 존재에게 그토록 큰 이점을 누릴 만한 무엇이 있단 말인가? 천체들의 그 불멸하는 삶과 그 아름다움, 웅장함, 그토록 정당하고 엄격한 규칙으로 계속되는 그들의 운행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우리가 거대한 세계의 하늘 사원을 우러러보고, 별들이 반짝이는 고정된 에테르를 바라보며, 달과 해의 궤도를 떠올릴 때면,
저 천체들이 우리 삶과 운명의 조건에 대하여 행사하는 지배력과 권능을 고찰하게 되노라,
인간의 행위와 삶은 참으로 별들에 달려 있으니,
우리의 성향 그 자체와 담론, 의지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그 영향력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밀어붙이며 흔들어대니, 우리 이성이 가르치고 발견하는 바가 그러하다. 멀리서 관찰하며 침묵의 법으로 지배하는 별들을 감지하고, 온 세상이 상호적인 이성으로 움직이며, 확실한 징조로 운명의 순환을 판별하는구나,
멀리서 관찰하며 침묵의 법으로 지배하는 별들을 감지하고, 온 세상이 상호적인 이성으로 움직이며, 확실한 징조로 운명의 순환을 판별하는구나.
한 사람이나 왕뿐만 아니라 군주국과 제국, 그리고 이 낮은 세상 전체가 지극히 작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 이것이야말로 왕들을 직접 지배하는 위대한 왕국이로다!
우리의 덕과 악덕, 우리의 능력과 학식, 그리고 우리가 별들의 힘에 대해 나누는 이 담론과 별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조차 우리 이성의 판단대로 그들의 매개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떤 자는 사랑에 미쳐 바다를 건너고 트로이를 전복시킬 수 있으며, 어떤 자는 법을 제정할 운명을 타고났도다. 보라, 자식은 아비를 죽이고 부모는 자식을 죽이며, 형제들은 무장한 채 서로를 상처 입히러 달려드니, 이 전쟁은 우리 것이 아니요, 이토록 엄청난 일을 하도록 강요받으며 스스로 형벌로 나아가 사지를 찢는 것 또한 운명이니, 이처럼 운명을 소비하는 것조차 운명이라.
우리가 가진 이성은 하늘이 나누어준 것인데, 어찌 그것이 하늘과 대등해질 수 있겠는가? 어찌 하늘의 본질과 상태를 우리의 과학 아래 둘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저 천체들에서 보는 모든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거대한 작업에는 어떤 노고와 연장, 지렛대와 기계, 그리고 어떤 일꾼들이 필요했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저들에게 영혼과 생명, 담론이 없다고 단정하는가? 우리는 저들과 복종하는 관계 외에는 아무런 교류도 없으면서 저들에게 움직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우리는 인간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에서도 이성적인 영혼의 사용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태양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태양과 같은 움직임이 없다고 해서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좁아질 것이다. '마음의 그토록 좁은 한계는 무엇인가?' 달을 하늘의 땅으로 만들고, 아낙사고라스처럼 그곳에서 산과 골짜기를 추측하며,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처럼 우리의 편의를 위해 그곳에 인간의 거처를 마련하고 식민지를 세우며, 우리의 땅을 빛을 내는 별로 만들려는 것은 인간 허영심의 꿈이 아닌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닥치는 다른 불편함들 중에서도 이것이 바로 마음의 어둠이니, 오류의 필연성뿐만 아니라 오류에 대한 사랑 또한 그러하다. 썩어질 몸은 영혼을 짓누르고, 땅 위의 거처는 많은 것을 생각하는 감각을 짓누른다.' 오만함은 우리의 자연적이고 근원적인 병이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연약한 것이 인간이며,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의 진흙과 오물 사이에 머물며, 우주에서 가장 나쁘고 죽어 있으며 고여 있는 부분에, 집의 가장 낮은 층에, 하늘의 궁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서, 세 가지 조건 중 가장 나쁜 조건의 동물들과 함께 묶여 있음을 느끼고 본다. 그런데도 상상을 통해 스스로 달의 궤도 위로 자신을 올려놓고, 하늘을 발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바로 그러한 상상의 허영심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신성한 조건을 자신에게 부여하며, 스스로를 다른 피조물들의 무리에서 분리하고, 동료이자 동반자인 동물들의 몫을 나누어 정하며, 자신이 보기에 좋다고 생각되는 대로 그들의 능력과 힘을 배분한다. 인간은 도대체 자신의 지성이라는 노력으로 어떻게 동물들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안다고 자부하는가? 인간은 도대체 동물들과 자신을 어떻게 비교하여 그들에게 어리석음을 덮어씌운단 말인가? 내가 고양이와 장난칠 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고양이가 나보다 더 나를 재미있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우리는 서로 흉내를 내며 어울린다. 내가 놀이를 시작하거나 그만둘 때가 있듯, 고양이에게도 제시간이 있는 법이다. 플라톤은 사투르누스 시대의 황금기에 관해 묘사하면서, 당시 인간이 누렸던 가장 큰 혜택 중 하나로 동물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인간은 동물들에게 묻고 배우면서 그들 각자의 진정한 자질과 차이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완벽한 지혜와 분별력을 얻었으며,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삶을 영위했다. 인간의 동물에 대한 오만함을 판단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증거가 필요한가? 그 위대한 저자는 자연이 동물에게 부여한 신체적 형태의 대부분은 오직 당대에 점을 치기 위해 사용하던 용도를 고려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동물과 우리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이러한 결함은 왜 그들에게만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인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동물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들도 우리를 우리가 그들을 여기는 것처럼 짐승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바스크족이나 트로글로다이테스족의 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폴로니오스 티아네오스, 멜람푸스, 테이레시아스, 탈레스 등 몇몇은 동물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자랑한 바 있다. 지리학자들의 말대로 개를 왕으로 추대하는 종족들이 실재한다면, 그들은 분명 그 개의 울음소리와 움직임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동물 사이의 동등함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동물의 감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지능이 있듯, 동물들도 우리만큼의 비중으로 우리의 감각을 이해하고 있다. 동물들은 우리에게 애교를 부리고 위협하며 요구하기도 하는데,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우리는 동물들 사이에 완전하고 온전한 소통이 존재하며, 같은 종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종들 사이에서도 서로 뜻을 통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말 못 하는 가축들도, 마침내 야생 짐승의 무리도 두려움이나 고통이 있을 때, 혹은 이제 기쁨이 솟구칠 때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어 울부짖곤 한다.
말은 개가 짖는 특정한 소리에서 분노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또 다른 특정한 목소리에는 전혀 겁먹지 않는다. 목소리가 없는 짐승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그들끼리 주고받는 행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소통 수단이 존재한다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의 움직임 자체가 곧 대화이자 교류인 것이다.
말을 배우지 못한 유아들이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게 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은 이치다.
우리네 벙어리들이 손짓으로 논쟁하고, 주장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안 되겠는가? 나는 그토록 유연하게 잘 훈련된 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전달하는 데 있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연인들은 눈빛만으로 화를 내기도 하고, 화해하고, 간청하고, 감사하며, 약속을 정하고, 결국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침묵 속에도 간청과 말은 담겨 있는 법이다.
손은 어떤가? 우리는 손으로 요청하고, 약속하고, 부르고, 떠나보내고, 위협하고, 간청하고, 애원하고, 부정하고, 거절하고, 질문하고, 감탄하고, 세고, 고백하고, 뉘우치고,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의심하고, 가르치고, 명령하고, 부추기고, 격려하고, 맹세하고, 증언하고, 비난하고, 단죄하고, 용서하고, 모욕하고, 경멸하고, 도전하고, 비꼬고, 아첨하고, 박수치고, 축복하고, 겸손을 표하고, 조롱하고, 화해하고, 추천하고, 찬양하고,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비탄하고, 절망하고, 당황하게 하고, 소리치고, 침묵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손은 혀가 질투할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다채롭게 움직인다. 고개로는 우리는 초대하고, 거절하고, 인정하고, 부인하고, 반박하고, 환영하고, 공경하고, 숭배하고, 경멸하고, 요구하고, 거부하고, 즐거워하고, 애도하고, 어루만지고, 질책하고, 굴복시키고, 뽐내고, 권하고, 위협하고, 장담하고, 탐색한다. 눈썹은 어떤가? 어깨는 어떤가?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곧 말이며, 배움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공용어다. 이런 움직임들이 다른 모든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다양하고 독특하게 사용된다는 점을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벙어리들이 필요에 의해 몸짓을 배우는 것, 손가락으로 글자를 만드는 법이나 몸짓으로 하는 문법, 몸짓으로만 행하고 표현하는 학문, 그리고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다른 언어를 갖지 않은 종족들에 대해서는 차치하겠다. 압데라 시의 한 대사는 스파르타의 아기스 왕에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이렇게 물었다. "자, 왕이여, 우리 시민들에게 어떤 대답을 전하면 좋겠습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다 하도록 내가 침묵 속에 두었다는 것을요. 이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침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동물의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능력과 비슷한 어떤 면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꿀벌의 사회보다 더 질서 정연하고, 더 다양한 임무와 역할로 나뉘어 있으며, 더 꾸준히 유지되는 체계적인 정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정연하게 배치된 행동과 일과들을 우리는 이성이나 지혜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징후를 보고, 벌들에게는 신성한 정신의 일부와 에테르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노라.
봄이 돌아와 우리 집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는 제비들은 과연 판단력도 없이 천 곳 중에서 자기네가 살기에 가장 편안한 곳을 무분별하게 고르는 것일까? 또한 그 아름답고 놀라운 둥지 구조를 만들 때, 새들은 사각형이나 원형, 둔각이나 직각의 조건과 효과를 알지도 못한 채 아무 도형이나 사용하는 것일까? 그들은 굳은 것이 젖으면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을 판단하지도 못한 채 때로는 물을, 때로는 진흙을 가져오는 것일까? 둥지 바닥에 이끼나 솜털을 까는 것은 자기 새끼들의 연약한 몸이 그곳에서 훨씬 부드럽고 편안할 것이라는 예견도 없이 하는 것일까? 빗바람을 피하고 집의 방향을 동쪽으로 잡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 저마다 다르며 어느 쪽이 자기들에게 더 이로운지 고려하지 않은 채 하는 것일까? 거미는 왜 어떤 곳에서는 그물을 두껍게 치고 다른 곳에서는 느슨하게 하는가? 왜 때로는 이런 매듭을, 때로는 저런 매듭을 사용하는가? 그들에게 깊은 숙고와 생각, 그리고 결론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한가? 우리는 동물의 작품 대부분에서 그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그것을 흉내 내는 우리의 기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충분히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친 작업 속에서도 우리가 쏟아붓는 능력과 우리 영혼이 모든 힘을 다해 그것에 관여하고 있음을 보는데, 왜 그들의 능력은 이만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단 말인가? 왜 우리는 자연과 기술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그들의 업적을 그저 알 수 없는 자연적이고 맹목적인 본능으로 돌리는 것인가?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에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우위를 부여하고 있다. 자연이 어머니 같은 다정함으로 손을 잡고 그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행동과 편의로 그들을 안내하는 반면, 우리에게는 위험과 운명에 내맡겨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기술로 직접 찾게 하고, 교육이나 정신적 노력으로는 동물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결코 따라갈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결국 그들의 짐승 같은 어리석음이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신성한 지성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능가하게 된 셈이다. 참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을 아주 불공평한 계모라고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우리의 질서가 그토록 엉망이고 무질서한 것은 아니다. 자연은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보편적으로 포용했으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풍족하게 제공하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에게서 흔히 듣는 불평들, 즉 (의견의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때로는 구름 위로 치솟았다가 때로는 정반대편의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우리가 발가벗은 채 헐벗고, 묶이고, 포박되어 타인의 가죽을 빌려 입고 무장할 수밖에 없는 유일하게 버림받은 동물이라는 식의 불평은 대체 무엇인가. 자연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 존재의 필요에 따라 껍데기, 꼬투리, 나무껍질, 털, 양털, 가시, 가죽, 솜, 깃털, 비늘, 모피, 비단을 입혀주었고, 공격과 방어를 위해 발톱과 이빨, 뿔로 무장시켜주었으며, 헤엄치고 달리고 날고 노래하는 등 그들 고유의 본능을 직접 가르쳤건만, 인간은 배우지 않고서는 걷지도,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며 오직 울 줄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더구나 어린아이는 거친 파도에 내던져진 선원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자연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빛의 세계로 처음 내보냈을 때 발가벗은 채 땅에 누워,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러하듯, 슬픈 울음소리로 온 사방을 채운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가축과 가축 떼, 야생 짐승들은 자라나면서 딸랑이도 필요 없고, 자애로운 유모의 다정한 어설픈 말투도 필요 없으며, 계절에 따라 옷을 찾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대지 그 자체와 만물을 솜씨 좋게 빚어내는 자연이 모든 존재에게 모든 것을 풍족하게 베풀어 주기에, 자신들을 지킬 무기나 높은 성벽 따위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불평들은 거짓이다. 세상의 질서에는 더 큰 평등함과 더 균일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의 피부도 날씨의 험난함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들의 피부와 똑같이 충분히 튼튼하다. 아직도 옷을 입지 않는 여러 종족이 그 증거다. 고대 골 사람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았고, 그렇게 추운 하늘 아래 사는 우리 이웃 아일랜드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바람과 공기에 노출하고자 하는 신체의 모든 부위는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 몸 중 약한 부위가 있어서 추위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소화가 일어나는 위일 텐데, 우리 조상들은 위 부위를 드러내 놓고 다녔고, 부드럽고 연약한 우리 부인들조차 때로는 배꼽까지 옷을 풀어헤치고 다닌다. 아이들을 꽁꽁 싸매고 포대기에 넣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라케다이몬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팔다리를 묶거나 굽히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키웠다. 우리가 우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동물과도 공통적인 현상이며,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울고 칭얼대지 않는 동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연약함에 아주 잘 어울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먹는 것 또한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가르침 없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누구든 자신이 남용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느끼는 법이니까.
스스로 먹을 힘을 갖춘 아이가 자기 먹을거리를 구할 줄 모른다고 누가 의심하겠는가? 다른 경작이나 기교 없이도 땅은 그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것을 생산하여 내어준다. 설령 일 년 내내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며, 개미나 다른 동물들이 일 년 중 수확이 없는 계절을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는 모습이 그 증거다. 우리가 최근 발견한 저 종족들은 수고나 가공 없이도 자연적인 고기와 음료를 풍족하게 공급받고 있으며, 우리에게 빵만이 유일한 식량이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경작이 없더라도 우리의 어머니인 자연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베풀어주었으며,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기교를 섞어놓은 지금보다 더 충만하고 풍요롭게 제공했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지는 처음에 스스로 빛나는 곡식과 풍요로운 포도나무를 인간을 위해 만들어냈고, 달콤한 열매와 기름진 먹이를 직접 베풀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노동을 더하고도 간신히 자라나며, 소들과 농부들의 기력마저 소진하게 하는구나.
우리의 식욕은 넘쳐나고 무절제하여, 우리가 채우려 애쓰는 그 모든 발명품을 앞질러 나간다. 무기에 관해서라면, 우리에게는 다른 대부분의 동물보다 더 많은 자연적 무기가 있고, 사지의 움직임도 더 다양하며, 배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활용한다. 맨몸으로 싸우는 데 익숙한 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위험에 뛰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짐승들이 이 점에서 우리를 능가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여러 짐승을 능가한다. 신체를 강화하고 획득한 수단으로 몸을 보호하는 기술 또한 우리는 본능과 자연의 가르침에 따라 갖추고 있다. 코끼리가 전쟁에서 사용하는 이빨을 날카롭게 갈고 다듬는 것(코끼리에게는 이 용도로만 쓰는 특별한 이빨이 따로 있는데, 그것을 아껴두었다가 다른 일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황소들은 싸우러 나갈 때 제 주위에 먼지를 뿌리고 흩날리며, 멧돼지들은 자기 엄니를 날카롭게 하고, 이크뉴몬은 악어와 맞붙어야 할 때가 오면 몸을 단단하고 매끄럽게 반죽한 진흙으로 갑옷처럼 둘러서 무장한다. 우리 인간이 나무와 철로 스스로를 무장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말에 관해서라면,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필수적인 것도 아닐 터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고립된 채 다른 이들과 단절되어 자라난 아이(물론 실제로 실험하기는 어렵겠지만)라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어떤 종류의 언어는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이 다른 여러 동물에게는 준 이 수단을 우리에게만 거부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 동물이 목소리를 사용하여 불평하고, 기뻐하고, 서로 구조를 요청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그 능력이 어찌 말하는 것과 다를 수 있겠는가? 동물들이 어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우리와 잘만 소통하고, 우리 또한 그들과 소통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개와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대화하고, 개는 또 우리에게 얼마나 잘 응답하는가? 우리는 새나 돼지, 소, 말과 대화할 때와는 다른 언어와 다른 명칭으로 개와 이야기를 나누며, 종에 따라 그 어투를 바꾼다.
그 검은 무리 속에서 개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쩌면 서로의 길과 운명을 살피는 것이리라.
락탄티우스는 동물들에게 말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웃는 능력까지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같은 종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언어의 차이가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관련하여 지역적 위치에 따른 자고새의 울음소리 차이를 언급한다.
각양각색의 새들은 저마다 때에 따라 다른 소리를 지르고, 계절에 따라 갈라진 울음소리를 부분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아이가 어떤 언어를 말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며, 예언을 통해 하는 말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누군가 이 견해에 반대하며 선천적 농아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이 단순히 귀를 통해 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결여된 청각이라는 감각이 언어 능력과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적인 구조로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즉 우리가 말을 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에게 말을 해야 하며, 외부로 내보내기 전에 먼저 우리 귀 안에서 그 소리가 울리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 모든 말을 한 것은 인간사에도 그러한 유사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우리 인간을 다시금 다른 피조물들의 무리로 되돌려 그들과 결합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나머지 존재들보다 위에 있지도, 아래에 있지도 않다. 현자가 말했듯,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법과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은 제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있도다.
어느 정도의 차이와 질서, 등급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모두 동일한 자연의 얼굴 아래에 있다.
모든 만물은 제 방식대로 나아가고, 모두가 자연의 확고한 법칙에 따라 차이를 간직하노라.
인간을 구속하고 이 질서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야 한다. 비참한 인간은 실제로 그 경계를 넘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같은 부류의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무에 묶여 있고 구속되어 있으며, 그저 매우 평범한 조건 속에 있을 뿐, 어떠한 특권이나 진정하고 본질적인 탁월함도 없다. 인간이 의견이나 상상을 통해 스스로 부여하는 특권에는 실체도 없고 맛도 없다. 설령 인간만이 모든 동물 중에서 상상의 자유와 생각의 무절제를 누리며, 있는 것과 없는 것, 원하는 것, 거짓과 진실을 그려낼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은 그에게 매우 비싸게 치러진 대가이며 조금도 자랑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짓누르는 죄악, 질병, 결단력 부족, 혼란, 절망 같은 고통의 주요 근원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동물이 우리가 선택과 노력으로 행하는 일들을 단지 자연적이고 강요된 경향에 의해 행한다고 짐작할 근거는 전혀 없다. 우리는 비슷한 결과가 나오면 비슷한 능력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하며, 더 풍요로운 결과가 나오면 더 풍요로운 능력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일하는 데 사용하는 이 동일한 사고와 동일한 방식을 동물들 역시 사용하고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사용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자연적 강제를 왜 동물에게 있다고 상상하는가? 게다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조건에 의해 규칙적으로 행동하도록 인도받고 의무를 지는 것이 무모하고 우연한 자유에 의해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롭고 신성에 더 가까우며, 우리 행동의 고삐를 우리 자신보다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더 안전하다. 인간은 자신의 오만한 허영심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자연의 관대함보다는 스스로의 힘 덕분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다른 동물들에게는 자연적인 축복을 풍요롭게 주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능력은 부정해 버리고, 스스로 얻은 능력으로 자신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려 한다.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학습을 통해 구걸하고 찾아다녀야 얻을 수 있는 능력보다, 오롯이 나만의 자연스러운 은총을 훨씬 더 소중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자연의 총애를 받는 것보다 더 훌륭한 칭송을 얻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트라키아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 위를 건너려 할 때 여우를 이용하는 방식, 즉 여우를 앞세워 강가에서 여우가 귀를 얼음 바짝 대고 밑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멀리서 들리는지 가까이서 들리는지를 살피며, 얼음의 두께를 가늠하여 물러서거나 나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떠오를 만한 동일한 추론이 여우의 머릿속에도 흐르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소리가 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얼지 않았다는 것이며, 얼지 않은 것은 액체이고, 액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어진다'는 식의 자연적인 감각에서 도출된 추론과 결론 말이다. 이러한 행동을 사고나 논리 없이 그저 청각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돌리는 것은 허상일 뿐이며,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여러 기획에 맞서 동물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교활한 수단과 발명품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동물을 붙잡아 우리 뜻대로 부리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두고 어떤 우위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위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노예가 있는데, 시리아의 클리마키데스 여인들은 귀부인들이 마차에 오를 때 네 발로 엎드려 발판이나 사다리 노릇을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대다수의 자유민조차 아주 사소한 편의를 위해 자신의 삶과 존재를 타인의 권력에 내맡기곤 한다. 트라키아의 아내들과 첩들은 남편의 무덤에서 죽임을 당할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독재자들이 자신들에게 헌신할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적이 있던가?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뒤를 따르겠다는 맹세까지 덧붙이지 않는가? 군대 전체가 이런 식으로 장수들에게 자신을 결박하기도 한다. 목숨을 건 검객들의 가혹한 훈련소에서 행해진 맹세의 문구는 이러했다. "우리는 쇠사슬에 묶이고, 불에 타고, 매를 맞고,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을 맹세하며, 진정한 검투사들이 주인에게 겪는 모든 고통을 감내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주인에게 매우 종교적으로 바친다."
원한다면 내 머리를 불태우고, 칼로 내 몸을 찌르고, 채찍으로 내 등을 갈기갈기 찢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