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명예에 관하여.
이름과 사물이 따로 있다. 이름이란 사물을 가리키고 의미하는 소리일 뿐, 사물의 일부도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덧붙여진, 사물 밖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조각이다. 그 자체로 온전한 충만함이자 모든 완벽함의 정점인 신은 내적으로 더 커지거나 늘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외부적 창조물에 바치는 찬양과 축복을 통해 그분의 이름은 커지고 늘어날 수 있다. 이러한 찬양은 우리가 신의 내면으로 결합할 수 없기에, 즉 신에게는 어떤 선의 추가도 있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그분 밖에 있는 가장 가까운 조각인 그분의 이름에 돌린다. 이것이 바로 영광과 명예가 오직 신에게만 귀속되는 이유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명예를 추구하는 것만큼 이치에 어긋나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적으로 궁핍하고 결핍되어 있으며, 우리의 본질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개선을 필요로 하므로, 바로 그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텅 비어 있다.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은 바람이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단단한 실체가 필요하다. 굶주린 사람이 맛있는 식사보다 멋진 옷을 마련하려고 애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부터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문에서 말하듯,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우리는 아름다움, 건강, 지혜, 미덕과 같은 본질적인 부분들이 부족하다. 외부적인 치장은 필수적인 것들을 충족시킨 후에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이 주제를 더 폭넓고 적절하게 다루지만, 나는 그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다. 크리시포스와 디오게네스는 명예를 경멸하는 사상의 최초이자 가장 확고한 주창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쾌락 중에서 타인의 인정에서 오는 쾌락만큼 위험하고 피해야 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배신을 초래하는지 느낀다. 군주를 아첨만큼이나 독살하는 것은 없으며, 악인들이 군주 주변에서 그토록 쉽게 신용을 얻는 수단도 없다. 또한 여성의 순결을 타락시키는 데 그토록 적절하고 흔한 중매 수단도 없으니, 바로 그들을 칭찬으로 먹이고 길들이는 것이다. 세이렌이 율리시스를 속이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마법도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우리 쪽으로 오라, 칭송받는 율리시스여, 그리스가 꽃피우는 가장 위대한 영예여."
그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명예를 다 합쳐도 이해력 있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했다.
"명예가 아무리 크다 한들, 단지 명예일 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명예 그 자체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명예는 종종 여러 편의를 수반하여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져다주고, 타인의 모욕이나 공격에 덜 노출되게 하며, 그와 비슷한 여러 이점을 안겨준다. 이는 또한 에피쿠로스의 주요 교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네 삶을 숨겨라"라는 그의 학파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공적인 직무나 협상에 얽매이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명예를 멸시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명예란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어 보이는 행동에 대해 세상이 보내는 인정일 뿐이다. 우리가 자신을 숨기고 오직 우리 자신만을 돌보라고 명령하며, 우리가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우리가 타인에게 존경받거나 영광을 얻는 것은 더욱 원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도메네우스에게 자신의 행동을 세간의 평판이나 명성에 맞춰 조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단지 사람들이 그를 경멸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다른 부수적인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말이다. 내 생각에 이런 담론들은 더없이 진실하며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내면에서 이중적이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고, 비난하는 것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에피쿠로스가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유언을 보자. 그 말은 위대하고 그러한 철학자에게 걸맞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자기 이름을 알리려는 기색과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비난했던 그 성미가 어느 정도 엿보인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받아 적게 한 편지이다.
에피쿠로스가 헤르마르코스에게 안부를 전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자 행복한 날을 보내는 동안,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방광과 장에 더할 나위 없이 극심한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내 발명과 내 담론을 떠올림으로써 내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으로 상쇄되고 있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품어온 그 애정과 철학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메트로도로스의 아이들을 보호해주게."
이것이 그의 편지다. 그가 자신의 발명품에서 느낀다고 말한 즐거움이 사후에 얻게 될 명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내가 해석하는 이유는 그의 유언장 내용 때문이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상속인인 아미노마쿠스와 티모크라테스가 에르마르코스가 정하는 비용에 따라 매년 1월 자신의 탄생일을 기념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매달 그믐날 20일에는 자신과 메트로도로스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모이는 친한 철학자들의 접대를 위한 비용을 대라고 명했다. 카르네아데스는 그 반대 의견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우리가 아무런 지식도 향유도 하지 못하는 후손을 사랑하듯, 명예도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견은 우리 성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의견들이 대개 그렇듯,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추종받는 견해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부적인 재화 중 명예를 첫 번째 자리에 놓는다. 그는 과도하게 명예를 추구하는 것과 지나치게 피하는 것, 이 두 가지 악덕을 모두 피하라고 조언한다. 만약 키케로가 이 주제에 대해 썼던 책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열정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감히 그럴 수만 있었다면 덕 그 자체도 그것을 따르는 명예를 위해서만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는 다른 이들의 극단에 기꺼이 빠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감추어진 덕은 묻혀버린 무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견해라서,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명예를 누리는 자의 지성 속에 어찌 그런 생각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개탄스러울 뿐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덕을 쌓으면 될 것이고, 덕의 참된 근거지인 영혼의 활동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알려질 일 말고는 굳이 규율과 질서를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몰래 교묘하고 은밀하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이 문제가 된단 말인가? 카르네아데스가 말하길, 만약 당신이 어떤 곳에 숨겨진 뱀을 알고 있는데, 그 뱀이 있는 곳에 당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앉으려 한다면, 그에게 경고해주지 않는 것은 악한 짓이다. 당신의 행동이 오직 당신 자신에게만 알려진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 스스로 선행의 법칙을 세우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 것을 곧 정의로 여긴다면, 우리는 매일 얼마나 많은 악행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게 되겠는가? C. 플로티우스가 오직 자기 자신만 아는 재산을 맡겼을 때 S. 페두카이우스가 그것을 충실히 돌려준 일, 그리고 나 또한 종종 그렇게 했던 일은 결코 칭찬할 만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오늘날 되새겨볼 만한 좋은 사례로 키케로가 비난했던 P. 섹스틸리우스 루푸스의 예를 들고 싶다. 그는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M. 크라수스와 Q. 호르텐시우스 역시 그들의 권위와 권력 덕분에 한 이방인에게 가짜 유언장에 따른 상속분 중 일부를 받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거짓에 가담하지 않은 것에 만족했을 뿐 그것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발이나 증인, 그리고 법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다면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즉 내가 생각하기에 신과 다름없는 존재가 증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명예로부터 덕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덕은 참으로 헛되고 사소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덕을 명예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위치에 세우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명성만큼 우연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운명은 모든 일을 지배한다. 운명은 진실보다는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물을 찬양하기도 하고 가리기도 한다." 행동이 알려지고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운명의 소관이다. 우리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그 변덕스러운 운명이다. 나는 명예가 공로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보았으며, 종종 공로를 훨씬 앞지르는 것도 보았다. 명예를 그림자에 비유한 사람은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나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명예는 극히 헛된 것이다. 그림자는 때로 실체보다 앞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실체보다 훨씬 더 길게 늘어지기도 한다. 귀족들에게 용기란 오직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명예롭지 않은 것은 곧 고귀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반문을 낳을 뿐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남들이 보지 않으면 결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자신의 용기를 증언해줄 증인이 있는지부터 살피게 된다면 얻는 게 무엇인가? 정작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고서도 선행을 행할 기회는 수천 번이나 있는데 말이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 묻혀버리는 훌륭하고 개인적인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혼전 중에 남을 감시하느라 정신이 팔린 자는 정작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며, 동료들의 행실을 증언하는 바로 그 행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자신의 비겁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진정으로 지혜롭고 위대한 영혼은, 자연을 가장 잘 따르는 고결함이란 명예가 아니라 행동 속에 깃들어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내 삶에서 바라는 모든 명예는 그저 평온하게 살아왔다는 것뿐이다. 메트로도로스나 아르케실라오스, 혹은 아리스티포스의 방식이 아닌, 나만의 방식대로의 평온함 말이다. 철학이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평온함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각자가 스스로 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가 누리는 그 무한한 명성의 위대함은 운명 덕분이 아닌가? 운명은 그들과 똑같은 용기를 지녔음에도, 운명의 불행이 그들의 시도를 시작 단계에서부터 완전히 가로막아버렸기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일찍이 꺾어버렸는가? 그토록 수많은 극단적인 위험 속에서도 카이사르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다는 글은 읽어본 기억이 없다. 그가 헤쳐 나온 가장 사소한 위험보다 더 작은 위험으로 죽어간 사람이 천 명은 될 것이다. 무한히 많은 훌륭한 행동이 빛을 보기까지는 증거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항상 무대의 배우처럼 성벽의 꼭대기에 서 있거나,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대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울타리와 도랑 사이에서 기습당하기도 한다. 닭장 앞에서 운을 시험해야 할 때도 있고, 헛간에서 비리비리한 총병 네 명을 끌어내야 할 때도 있으며, 군대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닥쳐오는 상황에 따라 홀로 일을 도모해야 할 때도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경험적으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기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전쟁에서도 고결한 사람들이 명예롭고 가치 있는 장소에서보다,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나 어떤 작은 판잣집 하나를 두고 다투는 과정에서 더 많이 희생되었다. 눈에 띄는 사건이 아니면 죽음을 헛되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죽음을 빛내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스스로 어둡게 만드는 것이며, 그러는 동안 스스로를 위험에 던질 수 있는 정당한 기회들을 수없이 놓치게 된다. 정당한 기회라면 무엇이든 충분히 빛나는 법이다. 양심이 각자의 삶에서 그 기회들을 충분히 큰 소리로 외쳐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예는 우리 양심의 증거이다." 자신의 행동이 알려지고,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할 때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덕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야만 비로소 선행을 하려는 자는 결코 타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겨울의 남은 날들 동안 그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행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일들은 너무나 감춰져 있었기에, 이제 와서 내가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올란도는 자신의 공적을 나중에 떠벌리기보다는 덕망 있는 일을 행하는 데 언제나 더 열중했으니, 증인이 곁에 있을 때가 아니면 그의 행적은 결코 드러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야 하며, 그로부터 어떤 훌륭한 행동에도, 아무리 은밀한 것일지라도, 심지어 고결한 생각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보상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잘 정돈된 양심이 선행을 함으로써 스스로 얻는 만족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운명의 공격에 맞서 확고하고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용기를 지니는 이점을 위해 용감해져야 한다.
"덕은 비열한 패배를 알지 못하며, 더럽혀지지 않은 명예로 빛난다. 또한 대중의 변덕스러운 바람에 따라 관직의 권위를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우리 영혼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만이 볼 수 있는 내면의 영역에서다. 그곳에서 영혼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 그리고 수치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영혼은 자식과 친구, 재산을 잃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안심시키며, 기회가 올 때면 전쟁의 위험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 "어떤 이익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결함이 지닌 미덕 때문에." 이러한 이익은 남들이 우리에 대해 내리는 호의적인 평가에 불과한 명예나 영광보다 훨씬 더 크고 바랄 만한 가치가 있다. 한 뼘의 땅을 판단하는 데도 온 나라에서 열두 명의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면서, 우리 성향과 행동에 대한 판단이라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무지와 불의와 변덕의 어머니인 대중의 목소리에 내맡긴다. 지혜로운 사람의 삶을 어리석은 자들의 판단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개개인은 경멸할 만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전체로 묶어놓으면 무엇인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자는 결코 일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마음만큼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것도 없다." 데메트리우스는 민심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그는 민심이 위로 뿜어내는 소리나 아래로 뿜어내는 소리나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이는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판단한다. 설령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중이 칭찬하는 순간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기술이나 기민한 정신으로도 그토록 갈피를 못 잡고 무질서한 가이드의 뒤를 따라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소문과 일반적인 견해들의 떠들썩한 혼란 속에서는 가치 있는 어떠한 길도 세울 수 없다.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목적을 애써 세우려 하지 말고, 이성만을 꾸준히 따라가자. 공적인 인정은 원한다면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올 것이고, 그것이 온전히 운명에 달려 있는 이상, 다른 길을 통해 그것을 얻으려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그 올바름 때문에 정당한 길을 따르지 않더라도, 결국은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에 나는 그 길을 따를 것이다. "섭리는 덕스러운 것이 더 유익하다는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다." 옛 뱃사람은 거센 폭풍우 속에서 넵투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신이여, 원하신다면 저를 구원하시고, 원하신다면 저를 멸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끝까지 제 키를 바로 잡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시대에 수많은 유연하고 혼혈적이며 모호한 인간들, 즉 누구도 나보다 세속적으로 더 신중하다고 의심치 않았던 그들이 내가 살아남은 곳에서 파멸하는 것을 보았다.
"성공한다면 책략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는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영광스러운 원정을 떠나면서, 자신이 없는 동안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판단을 함부로 내리는 방종은 큰일을 그르치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파비우스와 같은 강인함을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중의 상반되고 모욕적인 비난 때문에 자신의 권위가 헛된 인간들의 상상 속에 조각나는 것을 허용하느니, 차라리 평판이 좋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보다 자기 소임을 다하는 길을 택했다. 찬사를 받는다는 것에는 왠지 모를 자연스러운 달콤함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 심장은 강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훌륭하다"라거나 "멋지다"라는 말을 정의의 궁극적인 끝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나는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나 자신에게 어떤 존재일지는 신경 쓴다. 나는 남에게 빌려온 것이 아닌, 내 스스로의 힘으로 부유해지고 싶다. 외부 사람들은 사건과 겉모습만을 볼 뿐이다. 누구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속으로는 열병과 공포에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내 마음을 보지 못하고, 내 태도만을 볼 뿐이다. 전쟁 중에 나타나는 위선을 비난하는 것은 옳다. 전쟁터에서 교활한 사람이 위험을 피하고 용맹한 척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개인적으로 위험을 마주할 기회를 피할 방법은 너무나 많아서, 우리가 진정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을 천 번도 더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속으로는 떨고 있을지언정 좋은 안색과 확신에 찬 말로 연극을 꾸며낼 수 있다. 플라톤의 반지 이야기를 빌려, 손바닥 쪽으로 돌리면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그 반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정작 가장 나서야 할 자리에 숨어버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필요에 의해 용감하게 만들어주는 영예로운 자리에 놓인 것을 후회하겠지.
"거짓된 명예가 기쁘고 허위의 오명이 두려운 자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결점 많고 거짓된 인간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외적인 겉모습으로 내리는 모든 판단이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지 알 수 있다. 자기 자신보다 더 확실한 증인은 없는 법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명예를 함께 나누는 종군병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출된 참호 속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자가, 하루 5솔의 급료를 받고 앞서 길을 열며 자신의 몸으로 그를 보호하는 50명의 가련한 개척병들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소란스러운 로마가 치켜세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좇지 말고, 그 잘못된 저울에 대고 감정하지도 말며, 자신을 외부에서 찾으려 하지 마라."
우리는 이름을 떨친다는 것을 이름을 확장하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 이름이 좋은 평판을 얻기를 바라고, 그 이름의 확장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이러한 의도에서 가장 변명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병증이 심해지면 많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 대해 회자되기를 바라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트로구스 폼페이우스는 헤로스트라투스에 대해, 티투스 리비우스는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에 대해 그들이 좋은 평판보다는 큰 평판을 더 갈망했다고 적었다. 이런 악덕은 흔하다. 우리는 그 이름이 어떻게 평가받느냐보다 그저 회자되는지에 더 신경을 쓰며,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삶과 존재를 맡기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나는 내 자신이 오직 내 안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친구들의 기억 속에 머무는 그 또 다른 삶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그것이 헛된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 외에 내게 어떤 이득이나 즐거움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죽고 나면 그것을 느낄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던 실질적인 이점들조차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내게는 더 이상 평판을 붙잡아둘 손잡이도 없고, 그것이 내게 닿거나 영향을 미칠 경로도 사라진다. 내 이름이 그것을 대신 받아주리라 기대하기엔, 우선 내게는 오직 내 것인 이름 자체가 없다. 내가 가진 두 개의 이름 중 하나는 우리 가문 전체의 이름이자 타인들과도 공유하는 것이다. 파리와 몽펠리에에는 '몽테뉴'라는 성을 쓰는 가문이 있고, 브르타뉴와 생통주에는 '드 라 몽테뉴'라는 성을 쓰는 이들이 있다. 음절 하나만 바뀌어도 우리 혈통은 뒤섞일 것이며, 나는 그들의 영광을 나누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내 수치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집안은 예전에 '에켕'이라는 성을 썼는데, 이는 지금도 영국에 알려진 가문과 관련이 있다. 나의 다른 이름 역시 누구든 원하면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짐꾼에게 내 자리를 대신해 명예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내게 고유한 표식이 있다 한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무엇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것이 허무를 가리키고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가벼운 묘비는 뼈를 짓누르지 않네, 후손들은 칭송하고, 이제 그 영혼에서, 무덤과 축복받은 재 속에서 제비꽃이 피어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더구나 만 명의 군사가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는 전투 전체를 통틀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열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사적인 행동이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단지 총병뿐만 아니라 지휘관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운명이 그에 따른 아주 뛰어난 위대함이나 중요한 결과를 덧붙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명이나 두 명, 혹은 열 명을 죽이는 일이나 죽음 앞에 용감하게 나서는 일은 우리 개개인에게는 사실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며, 매일 그처럼 많은 일이 일어나고 또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일이 수없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그 어떤 특별한 칭송도 기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많은 이에게 알려져 익숙해졌고, 운명의 더미 가운데서 끌어내어진 것이다."
지난 1500년 동안 프랑스에서 무기를 들고 죽어간 수많은 용맹한 이들 중 우리가 알게 된 사람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지휘관뿐만 아니라 전투와 승리에 대한 기억조차 매장되어 버렸다. 세계 절반 이상의 운명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제자리에 머물지 못한 채 지속되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만약 내가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모든 종류의 사례를 통해 잘 알려진 사건들을 아주 쉽게 압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로마인과 그리스인조차 그 많은 작가와 증인들, 그리고 그토록 드물고 고귀한 업적들 속에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이토록 적은 것인가?
"우리에게는 명성이라는 가느다란 바람조차 거의 불어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백 년 후 우리 시대에 프랑스에서 내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략적으로나마 기억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전투에 나설 때 뮤즈 신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이는 자신들의 행동이 훌륭하고 품위 있게 기록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행동이 그것에 생명과 기억을 불어넣어 줄 증인을 만나는 것이 흔치 않은 신성한 은총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우리를 스치는 총알 한 방마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위험마다 즉시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설령 백 명의 서기가 그것을 기록한다 해도 그들의 평론은 사흘도 가지 못할 것이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대 기록의 천 분의 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더 짧게 혹은 더 길게 유지하는 것은 운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조차 나머지를 보지 못했기에 그것이 최악은 아닌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역사를 쓰지 않는다. 제국이나 왕국을 정복하는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고, 카이사르처럼 항상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쉰두 번의 정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그의 뒤를 따라 용감하고 씩씩하게 죽어간 수많은 훌륭한 동료들과 위대한 지휘관들조차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살아있는 동안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명성은 그들을 어둠 속에 감추어버렸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조차, 그들이 그 자리에 머문 지 석 달이나 삼 년이 지나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행위들이 책 속의 기억 속에 그 영광을 유지하고 있는지 정당한 척도와 비율로 고려해 본다면, 우리 시대에는 그럴 자격이 있는 행위나 인물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평판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덕망 있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그들은 젊은 시절 정당하게 얻은 명예와 영광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고통받지 않았던가? 고작 3년의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진실하고 본질적인 삶을 잃고 영원한 죽음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하겠는가? 현자들은 그토록 중요한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더 아름답고 정당한 목적을 세운다. "올바른 행위의 보상은 그 행위를 했다는 것 그 자체이다. 의무의 결실은 의무 그 자체이다." 화가나 여타 예술가, 혹은 수사학자나 문법학자가 자신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덕스러운 행위는 그 자체로 너무나 고귀하기에 그 가치 외에 다른 보상을 바랄 필요가 없으며, 특히 인간의 판단이라는 덧없는 것에 보상을 구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만약 이 잘못된 견해가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대중에게 도움이 된다면, 만약 그로 인해 민중이 덕을 향해 깨어난다면, 만약 통치자들이 세상이 트라야누스의 기억을 축복하고 네로의 기억을 혐오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다면, 만약 과거에는 그토록 두렵고 무서웠던 그 위대한 악당의 이름이 첫 번째 학생에 의해 그토록 자유롭게 저주받고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극을 받는다면, 그런 의견은 대담하게 키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람들 사이에 장려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을 덕 있게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플라톤 역시 그들에게 대중의 좋은 평판을 무시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또한 어떤 신성한 영감에 의해 악인들조차 때로는 말과 의견으로 선인과 악인을 정당하게 구분할 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 인물과 그의 스승은 인간의 힘이 필요한 모든 곳에 신의 역사와 계시를 결합하는 데 있어 경이롭고 대담한 일꾼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티몬은 그를 모욕하며 '위대한 기적의 제작자'라고 불렀을 것이다. "비극 시인들이 이야기의 결말을 풀어낼 수 없을 때 신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스스로의 부족함 때문에 정당한 가치를 충분히 지불할 수 없기에, 그 자리에 거짓된 가치라도 채워 넣는 것이다. 이러한 수단은 모든 입법자가 활용해 왔다. 어떤 체제든 허영에 찬 의례나 거짓된 견해가 섞여 있지 않은 곳은 없으며, 그것들은 민중을 다스리는 고삐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법은 그 기원과 시작이 신화적이며 초자연적인 신비로 장식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사이비 종교들에 신뢰를 부여하고 지성인들조차 그것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누마와 세르토리우스가 사람들에게 더 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을 그런 어리석음으로 달랜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는 에게리아 님프가, 다른 하나는 하얀 암사슴이 신들로부터 그가 취한 모든 조언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누마가 이 여신의 후광을 빌려 자신의 법에 권위를 부여했듯이, 박트리아와 페르시아의 입법자인 조로아스터는 오로마지스라는 신의 이름 아래 자신의 법에 권위를 부여했고, 이집트의 트리스메기스투스는 헤르메스의 이름을, 스키타이의 잘몰시스는 베스타의 이름을, 칼키스의 카론다스는 사투르누스의 이름을, 칸디아의 미노스는 유피테르의 이름을, 라케다이몬의 리쿠르고스는 아폴론의 이름을, 아테네의 드라콘과 솔론은 미네르바의 이름을 빌렸다. 모든 체제는 그 정점에 신을 두고 있다. 물론 다른 체제들은 거짓이나,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 민족을 위해 모세가 세운 체제는 진실한 것이다. 주앵빌 경의 말대로 베두인들의 종교는 무엇보다도 군주를 위해 죽는 이의 영혼이 이전보다 더 행복하고 아름답고 강력한 다른 육체로 옮겨간다고 가르쳤기에, 그들은 훨씬 더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걸 수 있었다.
"인간의 마음은 칼을 향해 기울어 있고, 영혼은 죽음을 감당할 수 있으며, 다시 돌아올 삶을 아끼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비록 허황된 믿음일지라도 이는 매우 구원적인 신념이다. 각 민족은 저마다 이런 사례를 다수 보유하고 있지만, 이 주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앞서 한 말에 한마디를 더하자면,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의무를 '명예'라고 부르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관습이 말하듯, 대중의 명성으로 영광스러운 것만이 정직하다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무는 알맹이고, 명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그들이 거절의 이유로 그런 핑계를 우리에게 대는 것도 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명예와는 상관없는 부분인 그들의 의도와 욕망, 의지가 행동보다 더 잘 절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허용되지 않아서 하지 않는 여자는, 실제로는 행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죄악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욕망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의 차이는 없다. 게다가 이것은 본질적으로 은밀하고 숨겨진 행위이기에, 만약 그녀들이 의무와 정조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명예의 근간이 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얼마든지 그중 하나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명예를 아는 모든 이는 양심을 잃느니 차라리 명예를 잃는 편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