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후네
효부쿄 친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얼핏 보았던 그 가을 저녁의 일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대단한 귀족의 딸은 아닌 듯싶었으나 자태가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원래 호색한 성미였던 터라 그 뒤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부인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연애 놀음 좀 하려 하는 것에도 당신은 질투가 심하구려.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며 원망을 늘어놓으실 때면 나카노키미는 괴로워서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버릴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로서의 대우는 해주지 않는다 해도 가벼운 정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끼며 세상의 눈을 피해 우지에 숨겨둔 여동생 히메기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들 친왕의 성정상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여종에게라도 마음이 끌리면 무분별하게 그 친정까지 찾아가시는 다정다감한 분이시니, 하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이 잊지 못하는 상대라면 반드시 추한 사건을 일으키실 터였다.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대장과 히메기미 모두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분을 말릴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그 경우 히메기미가 남이 아닌 이상 자신은 더 큰 수치를 겪게 될 것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실수로 운명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계기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하며, 친왕의 연심에는 동정하면서도 히메기미의 현재 처지는 말하지 않았다. 능숙한 거짓말로 둘러댈 수 없는 성격이었기에, 겉으로는 남편을 원망하며 깊은 질투를 품은 평범한 아내로 보일 뿐이었다.
가오루 대장은 연인을 믿기에 만남을 서두르지 않았고, 애타게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였으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띄기 쉬운 고관의 몸이라 적당한 명분이 없으면 가기 어려운 우짓길이었다. '그리우면 찾아오라지, 신께서 금하는 길도 아닌데'라고 막연히 말했던 그 길보다 이 길이 훨씬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그녀를 충분히 아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지에 갈 때마다 느끼는 우울함을 덜어내고자 그곳에 그녀를 머물게 하려던 것이 본래의 생각이었으니, 당분간 머무를 좋은 구실을 만들어 조만간 느긋한 마음으로 가서 만나리라. 그때까지는 숨겨둔 아내로 삼아 그녀의 마음에 불안을 주지 않고, 자신으로 인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게 하여 아내임을 자연스레 세상에 인정받게 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갑자기 누구의 딸인지, 언제부터였는지 뒷말이 오가는 것도 번거롭고 본래의 의도와도 달라질 것이었다. 또한 니조인의 뇨오에게 들켜서 옛 추억의 산장에서 대역인 사람이라도 얻으면 그만이라는 듯 데리고 나와, 옛사랑은 이미 잊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본의가 아니라고 여겨 그리운 마음을 억누르는 것 역시 평소의 느긋한 연애 성격 때문이리라. 하지만 교토로 맞이할 집은 준비하여 은밀히 짓게 하였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듯했으나 니조인의 부인을 보살피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를 아는 여종 등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조금씩 깨닫게 된 나카노키미는 이런 가오루의 성의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야말로 사랑한 이를 사후에도 오래도록 잊지 않는 깊은 사랑의 본보기라 생각하며 애틋함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상의 신망이 두텁고 관위의 승진도 눈부신 가오루였기에, 친왕이 너무나 진심 없는 태도를 보일 때면 불운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언니가 마음먹었던 대로 되지 못하고 남몰래 많은 번민을 겪어야 하는 아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이제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우지 시절과 지금은 너무나 세월이 많이 흘렀고, 어떤 정을 맺은 두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세 졌다, 보살펴주었다 하는 정도로 늘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온당치 않다거나, 이런 고귀한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례없는 일이라며 비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또한 친왕이 계속해서 이 관계를 의심하는 것이 이제 와서는 더욱 번거롭게 느껴진 탓에 자연스레 소원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지만, 가오루는 그럼에도 변함없이 호의를 간직했다. 친왕도 다정한 성품이 화근이 되어 부인을 서운하게 만드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어린 왕자가 귀엽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서는 내 자식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부인을 존중하며 허물없는 아내로서 누구보다 아꼈기에 이전보다 근심이 조금은 줄어든 나날을 나카노키미는 보내고 있었다.
정월 초하루가 지난 뒤 친왕은 니조인으로 오셔서 한 살 더 먹은 왕자를 곁에 두고 사랑해주셨다. 낮 무렵이었는데 작은 동녀가 초록색 얇은 종이에 쓴 큼지막한 편지와 소나무 가지에 매단 작은 수염바구니, 그리고 또 다른 접은 편지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달려와 부인 앞에 내려놓았다. 친왕이,
"그것은 어디서 보낸 것이냐?"
라고 말씀하셨다.
"우지에서 다유 님께 올리고 싶다며 찾아온 심부름꾼이 우왕좌왕하고 있기에, 늘 하시던 대로 다유 님께서 또 마님께 올리는 편지일 것이라 생각하여 제가 받아 왔습니다."
바삐 서둘러 말했다.
"이 바구니는 금박을 입힌 바구니로군요. 소나무도 진짜처럼 잘 만든 가지예요."
하고 기쁜 듯한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시고 친왕도 웃으시며,
"그럼 나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한번 볼까."
라고 말하며 받아 들려 하시자, 부인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편지만은 다유 님 계신 곳으로 가져가렴."
이렇게 말하는 부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을 친왕은 알아채셨다. 대장이 넌지시 보낸 편지일까, 우지에서 왔다고 시킨 것도 그 사람이 생각할 법한 일이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시더니 동녀에게서 편지를 직접 받아 드셨다. 과연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인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할까 생각하니 주저되기도 하셨으나,
"뜯어서 내가 읽어보겠소. 원망하려오?"
라고 말씀하시니,
"그런 것은 여종들끼리 주고받는 평범한 편지니 보셔도 재미없을 거예요."
부인은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럼 한번 보지요. 여종들끼리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하군요."
라고 말씀하시며 뜯어보시니, 젊은 필치의 글씨로,
그 후 뵙지도 못한 채 해가 저물었나이다. 산골 마을은 적적하오며, 산봉우리에서 안개가 떠날 날이 없나이다.
등의 글이 적혀 있고, 그 안쪽에는,
이것을 왕자님께 올리옵니다. 보잘것없는 것이오나.
라고 적혀 있었다. 특별히 귀족 여인 같은 기품은 보이지 않는 편지였으나, 짐작 가는 바가 없으셨기에 다시 접은 편지를 보시니, 영락없는 여종의 필체로,
새해가 되었는데 그곳은 어떠하신지요. 주인님과 여러분께도 경사스러운 봄이길 빌겠나이다. 이곳은 훌륭하고 풍류 넘치는 저택이오나, 젊은 분께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되지는 않나이다. 무료한 날들만 보내시기보다 때때로 그곳에 올라가 기분을 푸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만, 그 난처한 일이 있었던 날 이후로 무서운 마음에 혼이 나셨는지 여전히 침울해 계시나이다. 왕자님께 이곳에서 우즈치(卯槌)를 올리겠나이다. 변변치 못한 물건이오니 마님께서 보지 않으실 때 전해 주십사 하셨나이다.
세세하게 새해의 덕담도 잊은 채 주인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고지식한 마음이 엿보이는 편지를 친왕은 몇 번이고 읽어보시고는 수상하게 여기시어,
"이제 말해도 되겠지, 누구의 편지인가?"
라고 부인께 말씀하셨다.
"예전에 그 산장에 머물던 이의 딸이 사정이 있어 요즈음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일 겁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친왕은, 보통 여종 둘이 같은 계급끼리 주고받는 글도 아닐뿐더러 난처한 일이 있었다고 적힌 것은 그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깨달으셨다. 우즈치가 아름다운 세공으로 만들어진 것은 한가한 사람이 한 일로 보였다. 또한 가지에 야마타치바나 열매를 본떠 달아놓은 것에 덧붙여진 것은,
"아직은 묵은 나이가 아닐지라도, 그대를 향한 깊은 마음으로 소나무(松)를 기다리는 줄 알아주오."
이런 평범한 노래였으나, 늘 마음에 걸려 있던 사람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끼셨다.
"답장을 써 주구려. 무정하지 않소? 숨길 필요도 없는 편지를 내가 잠시 보았을 뿐인데 왜 그리 기분이 언짢으시오? 그럼 나는 저쪽으로 가겠소."
이런 말을 남기고 친왕은 부인의 거처에서 나가셨다. 나카노키미는 쇼쇼 등에게,
"친왕님께 들키고 말았으니 그이가 가엾게 되었네. 어린아이가 심부름꾼에게서 받았을 텐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걸까?"
하고 은밀히 이런 말을 나누었다.
"저희가 눈치챘더라면 어찌 가져다 올리게 했겠사옵니까. 대체 이 아이는 경솔하고 나대는 구석이 있사옵니다. 장래는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짐작하는 법인데, 차분한 아이라야 장래가 기대되는 법이지요."
하며 미워하는 것을 보고,
"그만들 하세요. 아이한테 화낼 것까지야 없잖아요."
하고 부인은 제지했다. 작년 겨울 어떤 이가 동녀로 봉공하게 한 아이였는데, 얼굴이 예뻐서 친왕도 귀여워하셨던 터였다.
자기 거처로 돌아오신 친왕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이후로도 대장이 우지에 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은밀히 묵고 오는 밤도 있다는 말에 깊이 사랑했던 이의 흔적이 남은 산장이라 해도 저런 곳에서 숙박까지 하는가 싶었던 의문이, 이렇듯 새로운 정인을 숨겨두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학문 쪽 일로 자기 저택에서도 부리는 다이키가 가오루의 집안사람에게 의지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시고는 거처로 부르셨다. 인푸타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시집 중 적절한 것을 골라 이곳 선반에 쌓아두라 명하신 후,
"우다이진이 우지에 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한가? 절을 훌륭하게 지었다더군. 한번 보고 싶구나."
하며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대단하옵니다. 부단삼매당 등도 훌륭한 설계로 짓게 하셨다 들었사옵니다. 우지에 가시는 일은 작년 가을쯤부터 이전보다 더 잦아진 것 같사옵니다. 아랫사람들이 은밀히 하는 말을 들으니, 애인을 숨겨두고 계신 듯하옵니다. 꽤나 귀하게 여기는 사람인 듯하오며, 대장의 그 근처 여기저기 장원의 사람들이 모두 명을 받아 산장의 일을 돌보고 있사옵니다. 교대로 숙직을 서게도 하는 모양이옵니다. 교토의 저택에서도 남모르게 필요한 물품을 산장으로 보내고 계시옵니다. 어떤 행운의 여인이기에 저렇듯 적적한 산장에서 지내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 이야기를 12월에 들었다며 제게 말해 준 이가 있었사옵니다."
하고 다이키가 말했다. 모든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고 친왕은 기뻐하셨다.
"어떤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던가? 저 산장에 원래 있던 비구니의 뒷바라지를 대장이 해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못된 말은 아니겠지?"
"비구니 스님은 복도 쪽 방에 계십니다. 그분은 이번에 지은 저택 쪽에 고운 여종들을 많이 거느리고 품위 있게 살고 계신 듯하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무슨 셈으로, 또 어떤 부인을 저렇게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독특해. 사다이진 등은 그가 종교에 너무 심취하여 산속 절 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을 두고, 신분상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사실 신앙을 위한 미행(微行) 같은 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역시 옛 연인의 집이라 마음이 끌려가는 것이라고 내게 말하는 자도 있었네. 그것 역시 정곡을 찌른 해석은 아니었군. 애인을 숨겨두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누구보다 자신은 성실한 인간이라고 표방하는 사람이, 그런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꾸며 애인을 은밀히 둔다는 것이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