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인과의 교제로 무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결코 연애 같은 것이 아니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말이오. 예전부터 그 사람은 그런 마음이 없는 별난 여성이오. 내가 쓸쓸할 때 편지를 써 보내면, 그쪽은 한가한 분이라 가끔 답장을 주시곤 하오. 진지하게 상대를 해주는 것도 아니니, 그런 걸 당신에게 하소연할 정도의 일도 아니라 일일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 먹으시오."
하고 말하며 겐지는 종일 부인을 달래며 보냈다.
눈이 잔뜩 쌓인 위에 또 눈이 내리고 있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재미있고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해 질 녘이라 사람의 미모도 유난히 빛나는 듯 보였다.
"봄이 좋다느니 가을이 좋다느니 하며 사람들의 취향이 늘 변하지만, 나는 겨울의 맑은 달이 눈 위에 비친 무색의 풍경이 몸에 사무치도록 좋구려. 그럴 때면 이 세상 밖의 거대한 세계까지 상상되어 이것이 인간이 느끼는 극치의 경지라는 생각도 드는데, 삭막한 것에 겨울 달을 빗대어 말하는 사람들의 얕은 식견이 떠오르는구려."
겐지는 이런 말을 하며 발을 걷어 올리게 했다. 달빛이 밝게 땅에 내려앉아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가운데, 덤불 속 관목들이 눌린 모양만이 애처로워 보이고 흐르는 물소리도 흐느낌처럼 들린다. 연못의 얼음이 반짝이는 모습도 대단했다. 겐지는 시녀들을 정원으로 내려보내 눈을 뭉치게 했다. 아름다운 자태와 머리 모양 등이 달빛 아래 더욱 돋보여, 조금 큰 시녀들이 여러 겹의 아코메를 입고 겉옷은 벗은 채 결비의 약식 차림으로, 이제 키가 훌쩍 커져 밑으로 길게 퍼진 머리카락이 눈 위에서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어린 시녀들은 아이답게 즐거워하며 뛰어다니다가 부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눈덩이를 더욱 크게 뭉치려 해도 이제 시녀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 굴릴 수 없게 되었다. 시녀 절반은 동쪽 문밖으로 모여 자신들이 나갈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정원에 있는 이들이 하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예전에 중궁께서 정원에 눈산을 만들게 하신 적이 있소.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그분은 그런 경우 아주 어울리는 행동을 하시는 분이었지. 어떤 때든 그분이 계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많소. 나 같은 이에게 법도를 넘어서는 대우는 하지 않으셨기에 세세한 것은 볼 기회가 없었지만, 나를 존경하는 마음을 믿어주셨소. 내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노래를 보내곤 했는데, 문학적으로 뛰어난 답장은 아니더라도 식견이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하시는 말씀마다 깊이가 있었소. 그토록 완벽한 귀녀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부드럽고 가냘프면서도 고고한 품위가 그분만의 것이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당신만은 혈연이 가까운 여인이라 그분을 많이 닮았구려. 당신은 다만 질투심이 좀 많은 점이 흠일지도 모르겠군. 전 사이인의 성격은 또 아주 다르시지. 내가 쓸쓸할 때 편지나 쓰며 교제하는 상대로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빛나는 친구로는 그분만이 유일하게 남아 계신다고 할 수 있겠지."
하고 겐지가 말했다.
"나이시노카미는 귀부인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계시고 경박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나는 신기할 따름이오."
"그렇소.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예로 지금도 물론 꼽아야 할 사람이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한 일로 남을 해쳤다는 후회가 들어 견딜 수가 없소. 하물며 다정한 생활을 해서 나이가 든 뒤에는 얼마나 후회할 일이 많겠소. 남들만큼 경솔한 짓은 하지 않는 남자인 줄 알았던 나조차도 이런데 말이지."
겐지는 쇼나이곤 이야기를 할 때도 눈물을 조금 흘렸다.
"당신이 눈에도 두지 않고 경멸하는 산장의 여인은, 신분 이상으로 귀부인의 자격을 모두 갖춘 사람이오만, 제 잘난 맛에 점점 좋아 보이는 것도 사람 나름이라 나는 그 점을 그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으로도 보고 있소. 나는 아직 아주 낮은 계급에 속하는 여인들은 모르지만, 내가 본 범위 내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좀처럼 없더군. 동의 인에 있는 사람의 선량함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소. 사랑스러운 사람이오. 그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지. 우리는 청춘 시절부터 서로 믿고 소박한 사랑을 이어왔소. 이제 와서 헤어지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소.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하오."
이런 이야기들로 밤은 깊어갔다. 달은 더욱 맑고 아름답다. 부인이,
얼어붙은 바위틈 물은 흐름이 막혔는데, 맑게 갠 하늘 달빛만이 흐르는구나.
이렇게 말하며 밖을 내다보기 위해 살짝 고개를 기울인 모습이 아름다웠다. 머릿결과 얼굴 생김새가 그리운 고인이 된 궁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겐지는 기뻤다. 밖으로 향해 있던 마음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원앙 울음소리를 들으며 겐지는
옛날이 그리워 쌓이는 눈 속에서, 슬픔을 더하는 원앙과 함께하는 괴로운 밤인가.
라고 읊었다.
침실에 들어간 후에도 겐지는 중궁을 그리워하며 잠이 들었는데, 꿈결도 아닌데 희미하게 궁의 모습이 보였다. 매우 원망스러운 태도로
"그토록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셨건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나는 수치스럽고 괴로운 마음뿐이오. 당신이 원망스럽군요."
라고 말씀하셨다. 대답하려 내뱉은 목소리가 꿈에 눌린 탓이었는지 부인이
"어머, 왜 그러세요? 어쩌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라고 말하는 소리에 겐지는 눈을 떴다. 매우 아쉬운 마음이 들어 터질 듯 뛰는 가슴을 부여잡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에서 완전히 깬 뒤에도 겐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부인은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일까 싶어, 자기만 소외된 듯한 쓸쓸함을 느끼며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눈 녹지 않는 잠에서 깨어난 겨울밤, 엉키고 맺힌 꿈의 짧음이여.
겐지가 지은 노래다. 죽은 연인을 꿈에서 보았음에도 마음은 위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움과 슬픔만 더해진 겐지는 일찍 일어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절에 불경을 부탁했다. 괴로운 일을 겪게 했다고 원망하신 것도 분명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겐지는 깨달았다. 불도를 닦으셨을 뿐 아니라 민중을 위해서도 큰 공덕을 쌓으신 궁께서 그 단 하나의 과실 때문에 이 세상의 죄업을 다 씻지 못하신 것인가 싶어, 깊이 생각할수록 겐지는 슬퍼졌다. 자신은 어떤 고행을 해서라도 쓸쓸한 저세상에서 속죄의 고통을 겪고 계신 중궁의 처소로 가 대신 죄를 갚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깊이 하며 하루를 보냈다. 중궁을 위해 자신이 직접 불공을 드리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세간의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혹여라도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라 겐지는 망설여지기도 해서, 홀로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을 계속 염송했다. 부디 같은 연꽃 위에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만으로는, 모습조차 볼 수 없는 물가에서 헤매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슬펐다고 한다.
(역주) 겐지노기미 3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