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삶이라는 연회에서 충분히 먹고 마신 손님처럼 떠나지 않는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면, 그것이 당신에게 쓸모없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잃어버린들 무슨 상관인가? 도대체 왜 그것을 또다시 원하는가?
왜 또다시 헛되이 사라지고 불쾌하게 끝날 것을 더하고자 하는가?
삶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너희가 하기 나름에 따라 선과 악이 머무는 장소일 뿐이다. 하루를 살았다면 너희는 모든 것을 본 셈이다. 하루는 모든 날과 같다. 다른 빛도, 다른 밤도 없다. 이 태양, 이 달, 이 별들, 이 질서는 너희 조상들이 누렸던 것과 같고, 너희의 후손들도 누리게 될 바로 그것이다.
조상들도 이와 다른 것을 보지 못했고, 후손들도 이와 다른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내 희극의 모든 막이 펼치는 배분과 다양성은 1년이면 마무리된다. 그대가 세상의 사계절이 돌아가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것은 세상의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아우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세상은 이미 자신의 연극을 마쳤다. 그 안에는 다시 시작하는 것 외에 다른 묘수는 없으니, 그것은 언제나 같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곳을 맴돌며 끊임없이 머물고, 해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스스로를 굴린다.
나는 너희를 위해 새로운 놀잇감을 만들어낼 생각이 없다.
그대에게 즐거움을 줄 만한 것을 더 이상은 고안해낼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게 자리를 내주었듯 그대도 다른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어라. 평등은 공정함의 첫 번째 조건이다. 모두가 포함되는 곳에 자신도 포함되었다고 불평할 사람이 누구인가? 아무리 오래 산다 한들 그대가 죽어 있을 시간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니 헛된 일이다. 그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그 상태는, 마치 그대가 요람에서 죽었을 때와 똑같이 긴 시간이 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 세대를 앞지른다 해도, 영원한 죽음은 여전히 그와 똑같이 남으리라.
그대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을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다 놓겠다.
그대는 정녕 모르겠는가, 죽음 뒤에는 살아남아 죽은 자신을 슬퍼하거나,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 또 다른 그대는 없다는 것을.
또한 그토록 애석해하던 삶을 다시 갈망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자신과 삶을 찾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 대한 그 어떤 그리움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무'보다도 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만약 '무'보다 더 작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무라고 보이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죽음은 우리에게 그보다 훨씬 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야 한다.
죽음은 살아 있는 그대에게도, 죽은 그대에게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죽은 뒤에는 그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시간보다 일찍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가 남겨두고 떠나는 시간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그대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 시간은 그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각해 보라, 영원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그 아득한 과거가 우리와 얼마나 무관했는지를.
삶이 어디에서 끝나든 그 삶은 거기에서 완성된다. 삶의 유용함은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않고 그 사용에 있다. 오래 살았어도 짧게 산 이들이 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 삶을 온전히 누려라. 충분히 살았다는 것은 세월의 숫자가 아니라 그대의 의지에 달려 있다. 쉬지 않고 걸어왔던 그 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세상에 끝이 없는 길은 없다. 동행자가 있다면 위안이 되겠지만, 세상 또한 그대가 가는 길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지 않은가?
삶을 다 마친 모든 것이 그대의 뒤를 따르리라.
모든 것이 그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리지 않는가? 그대와 함께 늙어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수천 명의 사람과 수천 마리의 동물, 그 밖의 수천 가지 피조물이 그대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 죽어간다.
밤이 낮을 뒤따르지 않은 적도, 새벽이 밤을 뒤따르지 않은 적도 없었으니, 그 시간들은 병든 이의 울음소리와 죽음과 검은 장례의 동반자인 통곡 소리를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물러설 수도 없으면서 어찌하여 뒤로 물러나려 하는가? 죽음을 통해 큰 고통을 피하여 안식을 얻은 이들을 그대는 충분히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죽음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이를 본 적 있는가? 스스로 경험하지도, 남에게서 듣지도 않은 것을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찌하여 그대는 나와 운명을 원망하는가? 우리가 그대에게 잘못이라도 했는가? 그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대를 지배하는 것인가? 비록 그대의 나이는 다 차지 않았더라도 그대의 삶은 이미 다한 것이다. 작은 사람도 큰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사람이다. 사람도 삶도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케이론은 시간과 지속의 신인 자신의 아버지 사투르누스에게서 불멸의 조건을 듣고는 그것을 거부했다. 진실로 상상해 보라, 영원한 삶이 내가 그대에게 준 현재의 삶보다 인간에게 얼마나 더 견디기 힘들고 괴로울지를. 죽음이 없다면 그대는 나를 죽음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끊임없이 저주할 것이다. 나는 죽음의 쓸모를 보고 그대가 너무 탐욕스럽고 분별없이 죽음을 껴안지 못하도록 일부러 약간의 고통을 섞어 놓았다. 삶을 도피하지도, 죽음을 외면하지도 않는 중용의 상태에 그대를 두기 위해 나는 삶과 죽음 모두를 달콤함과 쓴맛 사이에 조절해 두었다. 나는 그대들 현자 중 첫 번째인 탈레스에게 삶과 죽음은 차이가 없음을 가르쳤다. 그래서 누군가 왜 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매우 현명하게 답했다. '죽음과 삶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네.' 물, 땅, 공기, 불, 그리고 이 나의 건물을 이루는 다른 구성 요소들은 그대의 삶을 위한 도구일 뿐 죽음을 위한 도구도 아니다. 어찌하여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는가? 그날이 죽음에 이바지하는 것은 다른 날들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 걸음이 피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로를 드러낼 뿐이다. 모든 날이 죽음을 향해 가고, 그 마지막 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자연이 주는 귀한 가르침이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왜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얼굴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닥친 것이든 남에게 닥친 것이든, 우리 집에서 보는 죽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덜 무서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곳은 의사와 울보들로 가득한 군대가 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하나이거늘, 왜 농촌 사람들과 낮은 신분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큰 확신이 있는 것인가. 나는 우리가 죽음을 둘러싸는 저 끔찍한 표정과 장식들이야말로 죽음 그 자체보다 우리를 더 두렵게 만든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의 울음소리, 얼이 빠지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방문, 창백하고 슬픔에 잠긴 수많은 하인들의 시중, 어두컴컴한 방, 켜놓은 촛불, 의사와 설교자로 가득 찬 우리의 침상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의 총체이다. 우리는 벌써부터 수의를 입고 매장된 셈이다. 아이들은 친구들이 가면을 쓰면 그들을 보고도 무서워하는데,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얼굴뿐만 아니라 사물의 가면도 벗겨내야 한다. 가면을 벗기고 나면, 하인이나 평범한 하녀도 최근 두려움 없이 맞이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아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토록 거창한 준비를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것이다!